1.
_박카스 광고
_핫식스 광고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에너지 음료’의 소비율이 작년에 비해 12배 정도 상승했다고 한다. 롯데칠성의 ‘핫식스’나 동서식품에서 수입하는 ‘레드불’ 같은 고카페인 에너지 음료는 단지 밤을 새워 공부를 할 때만 마시는 것이 아니다. 클럽에서 밤새 놀기 위해서도 이런 고카페인 에너지 음표를 즐겨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강남과 홍대 클럽에서는 에너지 음료 폭탄주도 많이 팔리고 있다고 한다(양주와 에너지 음표를 1대 3비율로 섞어 한 잔에 7000~12000원에 판다고 한다). 공부를 할 때도 ‘핫식스’, 클럽에서 놀 때도 ‘핫식스’인 셈인데, 이는 원기를 회복하고 피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었던 ‘자양강장제’와 성격을 달리한다. ‘타우린’이 함유되어 있던 박카스(생생톤, 구론산바몬드 등)를 밤새워 놀기 위해 마시지는 않았다. 노동과 놀이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 박카스에서 핫식스로의 변화. 저 짧은 신문 기사에서 한국사회의 어떤 변모의 흔적을 잡아챌 수 있다. 요컨대 박카스란 ‘~이 되는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자양강장제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다짐이나 바람을 표출했었던 것(지킬 건 지키는 건전한 젊은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꼭 가고 싶다던 군대[정말?], 작은 회사를 크게 키워보고 싶다던 중소기업의 신입사원 등)에서 정해진 목표 없이 사력을 다해 하루를 보내는(every day 핫식스) 것으로, 내일을 위해 오늘을 마무리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위해 내일을 빌려쓰는 것으로 변모한 듯하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쪽)고 한 바 있는데 이를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음료가 있다’로 변용해볼 수도 있겠다.
2.
2012년 인문학 최대의 베스트 셀러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21세기의 시작을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은 신경증적이라고 한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가리키는데 이 질병들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는 것이 한병철의 진단이다. 이른바 면역학적 기술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새로운 질병이 창궐해 있다는 것. 문제는 이 사회의 그 병을 인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무통사회) 사회의 구성원들 또한 기꺼이 스스로를 끝간 곳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한병철이 말하는 면역학적 시대란 공동체를 건사하는 데 있어 ‘노동’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시대를 지칭하며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그어진 뚜렷한 경계선이 있던 시대(냉전 또한 이러한 면역학적 도식에 따름) 또한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기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주요 특징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이질성과 타자성은 ‘차이’로 대체되었다. 지난 시절의 It’s Different!(휴대폰 광고 카피)가 오늘의 ‘좋아요’(facebook)로의 이동, 아니 그 연속! 무론 여전히 많은 외부인이 세계 여기저기를 옮겨다니고 있지만 관광객이나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분자인데 자아는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한다.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치명적일 수 있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16쪽)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
긍정성의 과잉이 왜 병리적 상태인가? 같은 것은 항체의 형성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면역학적 배척은 같은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과 관련이 있다. ‘좋아요, ‘핫식스!’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과다’는 면역반응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긍성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으며 외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된다. 지젝(zizek)식으로 말하자면 ‘변비를 치료하는 초콜렛’은 면역학적인 도식이 아니라 과잉과 과다를 위한 도식이라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병철은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21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새로운 형태의 폭력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에 의해 산출된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사회는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와는 다른 성과사회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주민들도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로 불린다.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 ‘나’라는 주식회사를 경영하는 주주. 규율사회가 부정성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무한긍정의 사회다. ‘~해야 한다[앞에서 언급한 박카스의 슬로건 ‘~이 되고 싶습니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와 ‘~해서는 안 된다’의 양면 속에는 강제성과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성과사회의 구성원들은 “yes, we can!”만을 외친다. 이 복수형 긍정은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자신을 계발하는 것이 구성원들의 ‘덕목’이 된지 오래다. 스펙(spec)을 쌓아야만 한다는 강박에 자유로운 20대는 그리 많지 않아보인다. 스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스펙은 21세기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확신한가? 우리에게 허용된 무한한 자유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원들을 관리하는 통치성의 실현인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가령, 걸그룹‘티아라’가 7인조에서 9인조 체제로 돌입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티아라 "9인체제 시동 긴장감 팽팽" 2012.05.23 | 스포츠서울) 자기계발의 욕구 혹은 자유는 일견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개별자의 삶에 있어 ‘생존’이 가장 중요한 화두로 급부상한 문맥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자기계발의 열정의 기저에는 ‘베틀로얄’, ‘서바이벌’, ‘추방의 불가피성’, ‘쓰레기가 되는 삶’이라는 성과사회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다양한 장치들의 작동에 의한 감정인 것이다.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k팝 스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추방의 불가피성과 생존에의 욕구는 연예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는다.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기획사에서 생산해내는 아이돌들을 필두로한 k팝 열풍 또한 성과사회의 중요한 ‘성과’다. 그러니 자본제적 체제가 부여한 ‘미션’을 오늘 완수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일 당장 낙오(탈락)한다는 것.
3.
1997년, 한국사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하게 된다. IMF체제의 도입은 한국인들의 삶과 정서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탓에 한국인의 생존 의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변화가 국가적인 정책이나 기업의 운영 체제로부터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변모와 궤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바이벌형 리얼리티 TV가 거의 모든 방송 프로를 잠식했다는 것, 이것은 비단 브라운관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데, ‘추방과 생존’을 골자로 최후에 남은 1인(생존자)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서바이벌형 리얼리티 TV 쇼의 형식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작동원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TV 쇼’의 유행은 비단 특정한 형식의 TV 프로그램 범람으로 국한될 수 없다. ‘리얼리티’라는 가치의 확장은 구성원의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감시·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역할 또한 수행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데 조금의 거리낌이 없는 세대들이 ‘리얼리티 TV 쇼’류의 각종 미디어의 주요 소비자층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단지 특정 세대의 문화 정체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공개해야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아울러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리얼리티 TV 쇼’ 프로그램의 특성은 당대 구성원들의 심성구조를 주관하는 중요한 기제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매회 탈락자들 배출하면서 프로그램의 흥미를 더해가는 ‘리얼리티 TV 쇼’처럼 언제라도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내면화하는 것은 삶 속에 언제나 추방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 정신’이야말로 ‘생존’이 화두가 된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구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이 리얼리티 TV 쇼에 열광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에 골몰하고 있는 이 프로들이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실제적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읽었던 <<피로사회>>(한병철,문학과지성사, 2012)에 관한 메모를 기반으로 지난 학기 교양 강좌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정리해본 글이고 3장은 이미 발표한 글을 재활용한 것이다. 오디션형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대해 아직 하지 못한 말들, 해야할 말들이 많다. VHS와 블랙박스, 적외선 카메라와 일반인 섹스비디오, 홈비디오와 페이크 다큐 등을 버무린 원고지 100매 짜리 글을 기획하고 있다. 이 글 또한 청탁 없이, 원고 마감 없이, 자발적으로 써볼 요량이다. 이와 관련된 글들을 묶어서(이미 세 편 정도는 매체에 기고한 바 있다) 이후 <<추방과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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