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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강사의 몸, 동무의 몸

by 종업원 2012. 10. 31.

2012 / 9 / 3


11시 수업이 폐강된지 모르고 텅빈 강의실에 방문. 공허함과 약간의 공포를 느끼다. 학과 조교로부터 불필요한 충고를 받고 몸이 무거워졌으나 10명으로 진행된 소규모 강의에서 다시 힘을 얻다. 오늘의 강의를 간단히 평가해본다오늘 강의는 학생들의 발표(타인소개)와 나의 개입의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발표의 취지와 자신의 경험을 얼마나 잘 살려 말하는가에 따라 평가의 기준을 나눌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몇명이 안되는 인원들과 소규모로 진행되는 강의 속의 발표에서 중요한 것은 취지를 잘 살린다 거나 경험의 층위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저마다의 경험을 발표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아울러 발표의 내용들이 특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것은 ‘평가’(칭찬을 하거나 문제제기를 하거나를 포함하여) 방식으로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아닌 것인데, 오늘 4명의 발표를 들으며 드러나는 ‘패턴’ 속에 개입의 장이 마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각의 발표 면면을 평가하는 것보다 ‘패턴’의 양상을 설명하며 발표들에 말을 덧붙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수업이라는 상호작용의 활동 중에 요체는 잘 듣는 것이다. 선생은 우선 잘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먼저(先) 그 길을 간 이(生)는 말하기 보다 듣는 이라 하겠다. 정신이 산만하거나 육체가 병약하면 잘 들을 수 없다. 정서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할 때라야 ‘잘 들을 수 있는 것’. 그런 태도를 한 한기 동안 유지하는 것이 좋은 수업을 이끌어가는 ‘선생’의 첫번째 임무라는 것을 깨닫다이 작은 이야기들의 위계를 만들거나 특정한 잣대를 통해 작은 이야기를 크게 키울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보다 바로 그 작은 이야기들 속에 내장되어 있는 ‘패턴’을 보여줌으로써 '자아'의 굴레로부터 나올 수 있는 말-길을 마련하는 것.


그저 ‘먼저’ 봤던 책들에서 채집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업이야 외워둔 것을 늘어놓는 것이니 ‘컨디션’과 수업의 성취가 그리 긴밀하지는 않을 테지만 ‘응해서 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수업에서의 ‘컨디션’은 해당 수업의 성취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터. 그러니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자는 선생의 자격도 없는 것. 그것은 동무와의 사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터.


글보다 말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뜻을 다시금 새기다. 그곳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그 아름다움이란 다름 아닌 주고받음의 빛으로 넘쳐나는 곳을 가리킨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곳을 아름답게 하며 서로를 아름답게 비추는 것. 글보다 말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것()보다 주고받음의 노동을 통해서만 조형해갈 수 있다는 것. 어떤 글을 쓰고 있느냐(그의 성과)보다 어떤 말들을 주고 받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영혼의 크기를 확인할 수 있는 더욱 요긴한 방법일 듯. ‘말’은 결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주고받음을 통해서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그러니 말이 좋은 사람은 필시 몸이 좋은 사람일 수밖에 없을 터.


어휘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경험. 나는 이날 ‘실력’이라는 어휘를 반복적으로 변주해서 사용하게 되었는데, 수업의 전체적인 문맥이 그 ‘실력’이라는 어휘를 축으로 가지런히 배열되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때의 실력이란 위계화나 서열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차라리 ‘영혼의 성숙’에 더 가까운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수업 중에 나누었던 말들이 ‘실력’이라는 어휘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어휘를 감싸고 감추었던 모습을 드러내는 형국이랄까. 그렇게 가지런히 정리되는 순간 또한 생소한 경험이었는데, 그 생소한 경험의 중심에 ‘실력’이라는 어휘가 있었던 것. 저마다의 학생들에게 몇 가지 당부와 요청을 했었고, 제 각각의 성향을 살펴 그에 맞는 ‘실력 쌓기’까지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