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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동력(학)

by 종업원 2013. 9. 18.

  

  

 

 

      

 

 

 

1.

또 다시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비를 뿌린다. 얼마나 내리고 또 언제 그칠 것인지 이미 데이터가 나와 있지만 설사 비가 그치지 않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측가능한 시스템에 익숙해질수록 외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무덤덤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을 믿는다. 수많은 데이터는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사태들을 보조할 뿐이다. 오직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그러니 긴 장마로 붕괴되는 것은 ‘둑방’만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 또 믿음에 대한 믿음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실패’가 없는 세계. 서둘러 종말과 파국이라는 말로 핏대를 세우기 전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의 짝말이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산재해 있는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변화된 삶의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가 곧장 ‘낙오’나 ‘추방’이라는 의미로 입도선매되는 세계. ‘실패’의 효용가치가 바닥을 뒹굴고 대신 ‘시행착오’라는 가치가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시행착오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스템의 작동원리다. 조금씩 스스로를 개선해나가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거나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는 재생산 체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들만이 프로듀싱(producing) 되는 것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가는 구성원 모두가 자본제적 시스템 아래에서 프로듀싱 되고 있다. 실패가 말소된 거대한 인큐베이팅(incubating)의 세계.

 

모든 것이 죄다 ‘사이(間, between)’에 있다는 시대 감각 속에서 나는 ‘어떤 상실’을 감지한다. 시스템에 내맡겨진 삶의 질감을 매만질 수 없기에 대상과의 관계 맺기는 매번 좌절된다. 그럴수록 더욱 강력한 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삶을 엿보고 노출한다. 다 보여주고, 다 보고 있지만 정작 ‘삶’은 더욱 추상적인 것으로 변해간다. 미디어는 삶의 벌어진 ‘사이’를 메우거나 연결할 수 있게 하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주체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 다시 말해 장치(dispositif)라는 통치 기계에 다름 아니다. 틈(예외)을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이 개별자들의 삶‘에’ 접속(통치)하는 것. 시스템의 ‘접속’이 곧장 삶의 ‘접수’로 이어진다. ‘사이’가 그저 횡단과 월경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기능할 때 삶은 무수한 구멍으로 점철된다. 그 구멍에서 발생하는 누수로 인해 삶은 추상화된다. 무엇이 빠져나가는가? ‘말(언어)’이 빠져나간다. 아니 강탈당한다. 그러니 ‘사이’만큼 아픈 것이 또 있을까.

 

 

 

    2.

세상의 모든 ‘사이’가 언어의 최전선이다. 최하연은 그 최전선에 서서 ‘A’와 ‘B’ 사이에 무언가가 계속 생성되고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이’에 있는 ‘그것’을 찾는 것이 그가 최전선에 서는 이유일 것이다. A와 B 사이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끝없이 변하는, 잡아둘 수 없는, ‘언어’라는 것이. 헌데 그 언어는 “나의 혀로는 발음할 수 없는”(「먹」) 것이다. ‘A’ 다음에 필연적으로 ‘B’가 오게 마련인 세계에서 그는 A와 B 사이에 ‘다른 언어’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언어는 발음할 수 없다. ‘허공’처럼 감각할 수 없는 것이거나 “한꺼번에 솟아”(「먹」) 오르는 터라 ‘혀’(나-모국어)의 임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시는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일견 모호하고 추상적인 최하연의 시적 공간에서 어떤 실패를 반복해서 만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하연이 서 있는 ‘사이’에서 우리는 낚아채지 못하는 ‘순간’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시집『 팅커벨 꽃집』엔 무수히 많은 ‘꽃’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화원’과 관련된 여러 시편들이 있음에도 정작 꽃에 대해선 그 어떤 구체적인 형상도 얻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최하연에게 꽃은 ‘피는 것’이라기보다 ‘맺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었던 꽃은 천천히 지지만 맺혔던 꽃은 단숨에 사라진다. ‘순간’은 꽃피기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난파된다. 「난파선」을 둘러싸고 있는 ‘∼어야 했다’라는 종결형은 회한의 정서를 구축하기보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음을 전달하는 데 기울어져 있다. “꿈마다 포스트잇을 / 붙여놓았어야 했다”는 구절이 회한이 아닌 절망에 가까운 이유는 ‘꿈’에 ‘포스트잇’을 붙여놓는다고 한들, ‘발음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꿈은 ‘사이’의 산물이다. 어떤 방법을 써도 ‘꿈’을 붙들어 놓을 수는 없다. 「난파선」에서 내가 읽은 것은 불가항력적인 몰락의 순간에 휘발되어버리는 감각을 붙들려는 한 방식이다. 이 시가 “잠들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구절로 끝날 때 내게 남겨진 것은 막연한 회한이 아니라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난파선의 선명한 이미지다. 그러니 ‘사이’에 몰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명한 이미지의 상승이 함께 한다.

 

 

 

     편의점과 편의점 사이에

미루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허리를 꺾어놓아도

미루나무는 새의 둥지를 놓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세계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둥지와 둥지 사이엔 달이 있었다

눈보라가 둥지를 흔들고는

바닥을 뒤졌다

중력이 모자라 날개는 자유다

날개와 날개 사이에 안개가 있었다

달무리를 걷어낸 손가락이 얼얼했다

덜컹거리는 세계가 반짝였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엔

녹슬어 못 쓰게 된 거울이

거울과 거울 사이엔 네발 달린 짐승이

시린 달을 물어뜯고 있었다

-「핀볼」 전문

 

 

이미지들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비약적인 연쇄가 당혹스러운 이 시는 ‘핀볼’이라는 게임의 속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흰 공 하나를 구멍에 빠트리지 않고 끊임없이 튕겨 올려야 하는 ‘핀볼’이야말로 ‘사이’가 몰락만이 아닌 상승과 생성의 동력을 내장하고 있는 곳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편의점과 편의점 사이에 미루나무가 있고 둥지와 둥지 사이엔 달이 있다. 미루나무와 달이 편의점과 둥지를 뒤흔든다. ‘사이’에서 “문장하나가 고무공처럼 튀어”(「나니오시떼루」) 세계를 덜컹거리게 하고 팡파르를 울려 퍼지게 한다. 당신과 나 사이엔 무엇이 있는가? 당신과 나 사이엔 ‘말’이 있다. “뻐. 근. 하. 고. 도. 팽. 팽.”(「나니오시떼루」)한 ‘말’. 그 말은 덜컹거리는 세계를 반짝이게 할 수는 있지만 내 혀로 온전히 ‘발음’할 수는 없다. “거울과 거울 사이엔 네발 달린 짐승”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짐승(말)을 길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당신과 나 사이에 차라리 실패가 있다고 하자. 어떤 실패인가? ‘우연한 사건의 연쇄가 세상을 움직이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제임스 버크(James Burke)의 핀볼 효과(The Pinball Effect)보다 내겐 ‘먼저 간 실패보다 강한 실패’(「쥐며느리의 시간」)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가 최하연이 구축한 이 ‘사이’의 시학을 발견(학)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동력(학)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또한 이 때문이다.

 

 

 

 

    3.

고성만은 예감한다. 아니 경고 한다. “저녁 안개 몰려온다”(「생의 향기」)고. 이 예감이자 경고가 차마 노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저녁 안개’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도착해 있다. ‘저녁 안개’는 아스라한 풍경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사태에 더 가깝다. 고성만의 시가 쌓아올린 서정적 절창 사이에 깃들어 있는 불안과 초조를 내가 애써 읽으려고 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이다. 『햇살 바이러스』에 자명한 것 하나가 있다면 해결 불가능한 사태라 하겠다. 문제 해결의 프레임이 무력해진 상황. 고성만이 집중하고 있는 ‘어둠’은 이러한 사태 속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보인다.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찬 모더니티적 종말의 표상이 아닌 어둠 속에서 더듬어 갈 때 가까스로 열리는 ‘다른 길’에 대한 열망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러니 ‘어둠’은 해결해야할 문제라기보다 적극적으로 대면해야할 사태에 가깝다.

 

세상의 불이 갑자기 꺼져버리는 ‘블랙아웃’이라는 비일상적인 순간, 막을 수 없는 예외적인 일상으로 점철되어 있는 삶의 풍경을 보라. 고성만은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조우하게 되는 우리들의 삶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검은 페이지”(「블랙아웃」)에 주목하고 있다. “예고도 없이 빛이 사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빛이 찾아”온다. 문제는 이러한 ‘예고 없음’과 ‘갑작스러움’이 우리들의 삶의 조건이라는 데 있다. 고성만에게 빛은 “무소불위 전지전능한 [빛의] 권력”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에 반해 어둠은 상처이면서 동시에 권력에 무릎 꿇어야 하는 시스템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만) 부를 수 있는 “누군가의 이름”(「가장 어두운 마을의 잠」)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어둠은 빛의 권력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 있는 ‘다른 것’의 역사이기도 하다(“등뼈는 배를 닮았다 / 굳게 뻗은 용골 위로 흰 돛 펼치고 / 산 너머 둥둥 / 바다 건너 훠이훠이 / 실어다주는 // 꿈은 등뼈를 닮았다”, 「등뼈」). 가늠할 수 없는 ‘어둠’과 좀처럼 잡히지 않는 ‘사이’(「사이」)가 고성만의 시편 속에서 공명한다.

 

흥미롭게도 고성만의 시에선 숲과 나무가 햇빛의 반대편에 서 있다(「편백 숲에서」). ‘햇빛’의 명령에 획일화되는 세계 속에서(「햇살 바이러스」의 소녀와 소년 들) 점점 더 단단해져가는 존재들 향해 “추울수록 단단한 / 무늬를 얻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늬’란 ‘고유한 것’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다름 아닌 상처. ‘잘려진 것’에 가득한 생의 의지(“없는 가지 향하여 쏘아올린 물줄기에 / 밑동이 축축하다”, 「생의 향기」)를 어둠 속에서 매만지는 시인의 손길을 보라. 태풍에 쓰러진 나무토막에서 발견하는 ‘축축한 밑동’을 두고 서둘러 생을 행한 의욕이라고 말하지 말자. 그것이 태풍을 몰아내는 가장 쉬운 가상적인 방법임을 알고 있지 않은가. 태풍은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다음번 태풍에도 우리는 “밑동이 축축”한 나무토막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것을 물어야 한다. 몰려오는 ‘저녁 안개’ 속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에 대한 의욕이라는 프레임의 반복이 아니라 태풍(재난)이 삶의 조건이 되는 변화된 세계 속에서의 삶일 것이다.

 

서정적 자아의 감흥을 노래한 시들이 ‘절창’에 가깝지만 나는 도시의 생활 면면과 시대의 풍경을 찰나로 잡아채고 있는 시들(「블랙아웃」, 「햇살 바이러스」, 「검은 비 내린다」, 「구제역」, 「사이」 등)에 방점을 찍어두고 싶다. 그런 시들에 잠재되어 있는 ‘실패’의 동력이 조금 더 정직해보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시행착오들의 서명(署名)은 시스템의 것이지만 실패의 구체적 질감으로 길어 올리는 것엔 시인의 서명을 붙일 수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시인수첩》 2013년 가을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