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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부하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

by '작은숲' 2013. 6. 3.

누구의 부하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

-사사키 아타루(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다시 읽으며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명곡, <졸업>(2010)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널 잊지 않을게,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세상이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말 뒤에 ‘너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맞세워두는 것은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친 세상을 믿지 않고 다만 널 잊지 않겠다는 말 속엔 세상과 기꺼이 대결하겠다는 결의가 함축되어 있다. 이 노래와 “책을 읽었다, 읽고 말았다.”(33쪽)는 이 평범한 문장 속에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에너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이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는 것, 읽었기 때문에 계속 읽는 것, 그로 인해 쓰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너무 단순한 논리여서 그의 말이 싱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다’가 아닌 ‘읽고 말았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애쓰지만 사사키 아타루는 바로 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세계를 바꾸는 중요한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모두가 휴대폰을 쥔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단지 ‘나를 찾는 전화를 받지 못하면 어쩌나’라는 걱정 때문만은 아니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정보’에 접속해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 이때의 정보란 ‘평범한 삶’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 다름 아니다. ‘보통’과 ‘평범’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이토록 초조하게 ‘정보’의 꽁무니를 쫓고 있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초조해 하는 것은 죄’라는 ‘카프카’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정보를 모으려는 강박은 ‘명령’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악스럽게 쥐고 있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는 것, 다시 말해 시스템의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평범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평범’은 소박한 것이 아닌 ‘남들처럼’이라는 기준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가깝다. 그러니 평범이라는 불가능한 영역이 아닌 저마다의 고유한 삶이라는 가능한 영역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다르다. ‘정보’나 ‘준거’를 담고 있지 않는 책, 다시 말해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위험한 책만이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79쪽)라는 질문에 다가설 수 있게 한다. 바로 이 질문이 ‘평범의 감옥’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사사키 아타루에 의하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성서’를 읽고 또 읽었던 마틴 루터는 성서에 수도원도, 교황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미친 것인지의심하고 의심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오직 읽었기 때문에 되풀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위험함을 담지 하는 것임을 사사키 아타루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도서관은 무시무시한 탄약고다. 그곳에 모여 있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언제 미쳐버릴지, 폭발해버릴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저 문서고(탄약고)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본제적 체계의 ‘명령’(평범과 보통의 감옥)을 거부하고 또 파괴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구출해낼 수 있다.

 

  그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는 삶은 오직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읽고 쓰는 것은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니 굳이 ‘책’이 아니어도 좋다. 음악이든 영화든 상관없다. 초조해하지 않고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을 수 있는 삶을 구성하는 것,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영역으로 접근하는 행위라면 무엇이어도 좋다. 우리가 그러한 위험을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바로 ‘너’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다. ‘나’라는 감옥을 뚫고 ‘너’에게로 나아가는 위험한 도약에 고유한 삶의 방식이 움튼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271쪽)라는 ‘발터 벤야민’의 문장을 읽으며 ‘발소리를 들어버린 이’가 된다는 것의 의미 앞에 멈춰선다. 그리곤 다시 읽는다. 더 읽는다. 계속 읽는다. 그래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나야만 다르게 살 수 있다. 그러니 만나기 위해서는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꺼이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책’이라는 공공재를 읽고 쓰는 것을 그 시작점으로 삼는 것도 좋겠다.

 

《한국해양대학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