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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키운 장소, 약속을 키우는 마을

by 종업원 2014. 2. 10.

2014. 2. 10

 

며칠 간 붙들고 있던 후기. 늘 그렇지만 써야 할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붙들고 있을 때 각종 아이디어들이 놀라울정도로 왕성하게 샘솟는다. 바로 그것이 글을 쓰는 숨겨진 이유 중 하나이며, 바로 그것이 굳이 마감을 하지 않/못하고 오랫동안 글을 붙들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라는 생각. 써야 할 후기들이 산적해 있다.

누구도 청탁하지 않고 부탁하지 않은 글을 홀로 마감한다는 것. 그 막연함보다 그렇게 쓴 글들이 대개는 이상하고 가끔씩만 읽을만 하다는 것.

'약속'이라는 명사와 '약속 하기'라는 타동사를 오가며 '든든'이라는 부사에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듯이, 마을이 키운 '마을 작가'의 탄생을 축하하고 또 기념하는 마음으로 한 문단 한 문단 써내려 갔다.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후기'는 하찮아 보이는 글임에도 무엇보다 쓰기 어려운 글이기도 하다. 함께 한 일을 홀로 써야 하며 그럼에도 '함께'의 감각을 살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후기'를 성실히 쓰는 사람을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신뢰하는 편이다. '후기'는 '성찰'의 다른 말이며 '나눔의 실천'이기에.

 

 

 

 

 

곳(場)/간(間)/들(多)<7>

 

약속이 키운 장소, 약속을 키우는 마을
-김은진의 ≪AT≫(그린그림, 2014) 출간 파티(2014. 1. 24 / 중앙동 <모퉁이극장>)


사람들이 모여 있다. 모여 있는 사람들 덕에 충분히 환하지 않은, 외진 그곳이 외려 든든해보인다. 서로의 어울림으로 장소를 든든하게 키우고 있으니 사람들 또한 덩달아 든든할 게다. ‘든든’이라는 부사가 장소를 키우고 또 저마다의 몸과 마음에 내려앉을 수 있게 돕는 것이 있다면 그 첫 자리에 ‘약속’이...라는 관계 맺기 양식을 올려두고 싶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소문을 쫓거나 내밀한 비밀을 봉인하기 위한 욕망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켜내기 위한 의지의 내딛음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약속을 하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한 의지의 노동이 ‘든든’이라는 삶의 감각을 저마다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 내려앉을 수 있게 돕는다.

약속이란 계약과 달리 형식이나 체계가 모호하여 그 무게감을 인지하기 어려운 탓에 언제나 ‘어길 수도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더군다나 약속은 계약과 다르게 관계를 겁박하지 않는다. 갖은 위협으로 몰아세우지 않음에도 기꺼이 ‘어길 수도 있는’ 위험에 다가서려는 ‘약속 하기’라는 노동을 통해 조형되는 장소. 우리는 그곳을 ‘마을’이라 부르고자 한다. ‘마을 극장’, ‘마을 다방’, ‘마을 뮤지션’, ‘마을 작가’, ‘마을 요리사’, ‘마을 감독’……. 생활예술모임 <곳간>은 이 목록을 끝없이 늘려가고 싶다. 지난 달 모든 관객을 위한 마을 극장 <모퉁이 극장>에서 진행 된 김은진의 ≪AT≫(그린그림 2014) 창간 기념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를 채워주었고 ‘마을 작가’의 탄생을 함께 기뻐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에 대해 비판을 하고 때론 욕에 가까운 비난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과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어떤 쪽을 지지하고 있는가.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너무 매몰차게 대해서는 안 된다. 약속 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가 약속을 어기는 횟수도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약속을 하지 않는다. 다만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 계약을 철저하게 잘 지키고 계약 이행의 잣대로 관계를 판단하고 규정한다. 계약 이행의 유무로 판단되는 관계와 약속의 목록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자주 혼동되어 약속의 목록이 많은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관계의 책임을 추궁하곤 한다. 장소는 계약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 또한 다르지 않다.

부산의 작은 공간들을 순례하고 그것을 성실히 기록한 김은진의 첫 번째 저서 ≪AT≫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첫 번째 이미지는 숱한 ‘약속’들이다. 그런 이유로 ≪AT≫의 저자를 한 문장으로 소개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 누구보다 약속을 많이 하고 또 그 약속을 성실히 지켜온 사람. 가도 되고 가지 않아도 되는 자리, 써도 되고 쓰지 않아도 되는 기록이란 하찮음의 표지가 아니라 언제라도 어길 수 있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 ‘약속 하기’라는 노동의 표지다. 김은진이 묶은 ≪AT≫을 한 문장으로 소개하고 싶어진다. ‘약속의 목록집’. ≪AT≫은 김은진이 지키고 가꾸어 보살펴온 약속의 목록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약속의 매듭’이 사람들을 다시 약속하게 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불을 밝힌다.

‘약속 하기’라는 증여의 노동을 동력 삼아 장소에 불이 들어오고 온기가 발생하여 그곳이 꽉 찬다. 그리고 마침내 든든해진다. ≪AT≫의 출간을 축하하고 또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퉁이극장>을 찾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퉁이극장>을 찾은 이들이 이날도 <모퉁이극장>이라는 장소를 지켰다. 보살폈고 키웠다. 약속을 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키는 이를 ‘장소의 파수꾼’이라 부르고 싶다. <모퉁이극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행사 포스터와 알림판, 관객들이 남긴 메모와 영화의 스틸들이야말로 약속의 흔적이다. 영화의 관객들은 <모퉁이극장>에서 무엇보다 우선 약속을 한다. 영화의 관객들이 맺는 약속이 영화를 지키고 도 키운다. 이날 축하 공연을 위해 참석했던 포크 뮤지션 ‘이내’가 부르는 노래의 진원지는 ‘약속의 목록’이다. <생각다방 산책극장>은 어떤가, <산복도로 프로잭트>는 어떤가.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서로가 맺고 있는 약속의 목록을 든든하게 지켜가는 것. 바로 그곳을 우리는 도시에 마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마을처럼 살아가는 현장임을 알게 된다.

“작은 점도 그릴 수 있으니까, 커다란 점도 그릴 수 있을 거야.”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아이에게 건네는 말을 낭독(구연)하며 1부의 문을 열었던 김은진의 목소리. 작은 점들이 맺어가는 연쇄가 커다란 점으로 퍼져간다. 작은 점(기록) 하나가 만드는 약속 하지 않는 관계에, 약속이 없는 세계에 파동(波動)과 파문(波紋)을 만들어 낸다. 약속의 목록이 새기는 관계의 무늬. 그 무늬가 마을의 깃발이다. 약속의 파수꾼들이 사는 마을에 나부끼는 마을 깃발. 우리는 그곳을 약속이 키운 장소이자 약속을 키우는 마을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기로 기꺼이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