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진 씨의 첫번째 책 『AT』(그린그림, 2014)의 발문으로 쓴 글. 부산의 작은 공간과 모임들을 순례하고 유랑하며 쓴 글들이 '그린그림'이라는 독립출판팀을 만나면서 '책'의 형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부산의 크고 작은 모임들과 장소들 또한 김은진 씨의 기록-노동 덕에 역사의 흔적을 나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순례와 유랑의 걸음은 도시를 마을처럼 사(걷)는 보법을 닮아 있다. 김은진 씨가 만난 숱한 이들 또한 비슷한 걸음걸이를 하고 있을 게다. 그 걸음들이 함께 저자를 만들어 냈고 그와 동시에 작은 모임과 장소의 역사 또한 피어났다. 평범한 듯 보이는 이 책이 무척이나 비범해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출간 기념일 때 내가 은진 씨를 두고 '마을 작가'라 불렀던 것 또한 '소박함' 때문이 아니라 보기드문 '비범함' 때문이었다. (2014. 2. 15)
불쑥 내민 손*
1.
카메라를 샀다. 기념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기록해야 할 관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에 나는 카메라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작고 연약한, 언제라도 속절없이 사라진다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들과 장소들을 기록한다는 것. ‘카메라를 샀다는 것’은 어떤 염원과 바람을 담은 선언과 같은 것이리라. 내 동료들, 그리고 그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는 나의 모습,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놀랍게도 오직 ‘기록’을 통해서만 그 염원과 바람을 담아낼 수 있다.
‘기록’은 창조적인 행위도 아니고 글쓴이가 남길 수 있는 서명의 고유성 또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간 상대적으로 제대로된 조명을 받지 못했거나 그 가치가 폄훼되어 왔다. 더군다나 작고 연약한 모임과 장소에 대해 기록한다는 것은 한갓 개인의 일상사나 감상쯤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기록이라는 글쓰기 행위 속에 내장되어 있는 ‘약속 하기’라는 잠재적 실천성에 기꺼이 주목하고 싶다. ‘기록한다는 것’은 ‘기억’이라는 일차적인 목적을 넘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맞이 하고 또 염원하는 ‘기약(期約)’의 의미까지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부탁도 아닌, 그 어떤 계약도 아닌, 약속을 한다는 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환대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지킬 수 없는 약속 따윈 하지 않고 모두가 오직 지킬 수 있는 약속만을 한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이란 합당한 듯하면서도 어쩐지 ‘계약’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도처해 있는 상식과 정상성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먹어치우고 있지 않은가? ‘계약’이라는 매끄러운 법적 체계가 관계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지 않은가? 약속을 키울 수 없는 사회란 미래에 대한 환대가 없는 조건을 가리킨다. ‘약속’이야말로 지킬 수 없는 것에 기꺼이 다가서겠다는 ‘의지의 내딛음’이지 않은가. 그러니 ‘약속을 하는 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새로운 관계를 환대하고 그 미래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묻자.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약속 하기’라는 행위를 감행하는 일상적 실천이다. 여기 김은진이 묶은 한 권의 기록지는 만남과 사귐의 이력 속에 쟁여져 있는 ‘약속의 목록’이며 동시에 그 약속을 지켜온 이력이라 해도 좋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관계를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관계를 발명하는 창조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책은 ‘기록의 묶음’이라기보다 차라리 ‘약속의 맺음’이라 불러야 한다. 한 개인이 이드거니 만나고 사귀며 바지런히 기록한 애씀의 노동으로 엮은 이 책에 맺혀 있는 현재와 미래가 직조하고 있는 겹의 시간을 보라.
2.
얼마 전 중앙동 ‘마크 커피’에 들렀다. 좁은 가게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입구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며 짧은 메모를 했다. 어쩐 일인지 유독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무척 진기한 발견을 했다.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5-6명의 사람들이 카페로 들어오면서 한결 같이 마크 커피 사장님에게 건네는 말, “감기 다 나으셨어요?” 무척 일상적인 인사지만 내겐 무엇보다 진기한 말처럼 들렸다.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카페에 들어서면서 그 가게 운영자의 건강을 걱정하는 소소한 말건넴은 끼리끼리 모여 오직 홀로, 혹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는 지금의 카페 문화 속에서 보기드문 풍경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크 커피 사장님의 옅은 기침과 그 기침에 대해 ‘감기가 오래 가네요’라고 건네는 말은 별스러운 것이 아니면서 동시에 세상의 유일한 안부 인사이기도 하다. 그 안부 인사 속엔 일상을 공유하고 나누어온 관계의 이력이 맺혀 있다. 안부 인사야말로 저마다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귐의 열매다. 김은진의 이 기록들이 내겐 세상의 기침, 동료의 기침에 건네는 안부 인사와 같았다. 안부 인사로 ‘세상의 감기’에 어떤 차도가 있을지 짐작할 순 없지만 그 말건넴이 없던 길을 여는 ‘한 걸음’인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세상의 길 위에 찍힌 발자국 하나를 보며 나는 기분 좋게 예감할 수 있다. 그 발자국 곁에 숱한 발자국이 찍힐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내뱉는 기침에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말이다. 그 발자국에 조심스레 나의 발을 대어본다. 그리곤 이내 그 발자국 옆에 나의 발자국을 남긴다.
김은진의 기록을 따라가다보면 ‘도시를 마을처럼 걷는 방식’을 배울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걸음에 자신이 무언가를 개척한다거나 만들어가고 있다는 과잉된 자의식이 없다는 데 있다. 그 걸음은 서로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어렵지 않은 행위처럼 보이지만 일상을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공동의 장소를 애써 가꾸어온 이들만이 내딛을 수 있는 귀한 것이기도 하다. ‘도시에 마을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지만 ‘도시를 마을처럼 사(걷)는 것’은 지금 당장 해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김은진의 기록이 꼭 그와 같다. ‘자아’의 집에서 걸어 나와 ‘너’에게로 걸어가는 길. 때로는 성큼성큼, 때로는 조심조심 내딛는 그 걸음걸음이 쌓일 때 보이지 않던 마을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 열린다. 장전동의 카페 <헤세이티>와 <업스테어>, 대연동의 <생각다방 산책극장>, 중앙동의 <모퉁이극장>과 <키친. K> 그리고 <바다sea갤러리>, 복천동의 <오월열한시>, 거제동의 <공간 초록>과 <프롬더북스>, 동대신동의 <산복도록 프로잭트>, 공간이 없는 생활예술모임 <곳간>에 이르기까지 애써 걸어가 만나고 말을 주고받으며 보살핀 관계의 이력들이 쌓일 때 이 지명과 공간은 도시의 일부분이 아닌 아직 드러난 적 없는 ‘마을’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3.
한 번의 장례식과 한 번의 혼인식을 계기로 시작된 글쓰기가 때로는 기록으로, 때로는 일지로, 때로는 비평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확인한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글쓴이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장례식이라는 계기를 통해 시작하게 된 ‘기록’을 버릇 삼아, 혼인식으로 소개 받은 ‘공간’들을 찾아가 응원하고 보살핀 이력은 결코 균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당도하는 공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 것은 이 기록이 개인적인 유희나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 아닌 ‘살림’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살림이란 함께 어울리며(살아가며) 그곳을 보살피는(불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그 살림의 이력이기도 한데, 누군가가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망실되고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과 장소를 빼곡히 쟁여두고 있는 이 책은 김은진이라는 저자의 이름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리고 또 살(불)려가는 ‘살림의 교본’ 역할을 너끈히 해낼 수 있을 듯하다.
이 기록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찾는 자기 탐색의 과정 속에서 만난 문장 하나. “무심히 내 일상들에 손을 내밀어 그 팔을 붙들며 위로하며 살 거다.”(2012.12.29) 일상들에 ‘손을 내민다는 것’은 손과 손이 만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손의 주고-받음이라는 상호적 노동을 통해 일상을 가꾸고 또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의 숱한 기록 속에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발자국’을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 홀로 할 수 없는 것을 누군가의 손이 돕는다. 다만 무심하게.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열정을 다시 지피는 땔감과 같은 기록이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 비유하자면 천 개의 문을 함께 열어젖히는 천 개의 손(상호적 노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김은진의 기록은 좋은 말과 잘 쓴 글만을 선별해서 남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의 기록을 보듬어 살피고 있는데, 그것을 일상에 주름 새기기, 시간에 주름을 만드는 행위라 불러도 좋을까. ‘주름’이란 매일 매일 성실하게 쟁여놓는 사귐의 이력이며 그렇기에 언제라도 펼쳐낼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우리들의 일상이 숱한 사람과 공간의 관계가 직조한 겹침의 시간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김은진 써내려간 이 기록은 우리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다.
여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해보라. 여러 사람의 이름이 겹쳐 있지 않은가. 어서 편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해보자. 이 편지는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 마치 앞선 발걸음에 내 발을 대어보듯, 그 옆에 또 다른 발자국을 남기듯 그 편지에 또 다른 기록(목소리)을 덧붙여야 한다. 편지를 봉하는 이유는 특정한 이만이 봐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달되기(address) 위해서이지 않은가. 무수한 사람들과 공간의 이름이 겹쳐 있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두께. 나는 그것을 관계의 두께이자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질감이라고 부르고 싶다. 누군가의 이름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포개어져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익명의 이름으로 오늘도 편지가 발송된다. 불쑥 내민 손들이 함께 써내려간 한 통의 편지가 또 다른 장소와 사람들에게 도착한다. 그렇게 또 다른 만남이, 새로운 장소가 열린다.
오직 동료와 이웃만이 닫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불쑥 내민 손이 ‘미래의 문’을 연다. 김은진이 애써 남긴 이 기록이야말로 ‘불쑥 내민 손’이며 그 속에 ‘약속 하기’라는 실천적 행위가 잠재되어 있다. 그러니 이 기록들, 편지 뭉치는 ‘약속의 목록’이며 동시에 ‘희망의 목록’이기도 하다. ‘희망’은 ‘불쑥 내민 손’처럼 그렇게 우리를 향해 손 뻗는다. 무심히 내민 그 손을 잡고 또 다른 이를 향해 손을 뻗는 것. 희망은 그렇게 애써 내민 손들의 맞잡음을 통해서만 겨우 만질 수 있다. 이 책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 이기성의 시집 『불쑥 내민 손』(문학과지성사, 2004)의 제목을 차용.
김은진, 『 AT』, 그린그림, 2014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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