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던지기

“괴물이 나타났다, 인간이 변해라!”

by 종업원 2013. 3. 5.

* 계간 <<실천문학>>에 기고한 서평을 앞질러 올려둔다. 짧은 서평이지만 실로 간만의 청탁인 터라 조금 반가웠던것은 사실이나 책이 출간되기 전이라 A4용지에 출력된 소설들을 읽는 것이 뭐랄까,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더이상 '그저 그런 서평'은 쓰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지만 '생각'만으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법. '그렇고 그런 서평'정도 밖엔 쓰지 못했다. 청탁이 아니었으면 읽을 기회가 없었을 법한 한 작가의 진중한 고민에 나름의 방식으로 동참했다는 정도가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 본문에서 내가 사용한 '게토'라는 용어의 역사적 층위를 자세히 설명하며 다른 용어로 바꾸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해준 이석호 편집장님의 개입이 인상적이었다. 훌륭한 편집자와 책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다. 주변의 반응이나 평가는 극도의 회의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래도 나는 <<실천문학>>에 대한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특히나 무크지 형태로 출간되었던 1980년대의 초기 잡지를 펼쳐볼 때, 아직은 이 잡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괴물이 나타났다, 인간이 변해라!”

-이재웅의 소설집 불온한 응시(실천문학사, 2013)를 읽는 하나의 방법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 아니 그 무엇도 ‘사건’이 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모두가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공포다. 이재웅의 불온한 응시』가 내게 철지난 후일담류 소설이 아닌 일종의 ‘괴담’으로 읽혔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재웅이 보여주는 세계는 다음과 같다. 모두가 매순간 정신없이 ‘일’(labor)에 열중하고 있지만 아무런 일(event)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다만 어떤 일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가끔 그 일을 기억할 뿐이다. 언젠가 일어났던 일들만이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왜곡된 채 지워지지 않은 얼룩처럼 남아 있을 뿐, 일어나는 일이 없는 세계. 흔히들 슬럼(slum)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곤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제적 체제가 공장과 공장 밖을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바로 슬럼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보자. 이재웅은 ‘사건 없는 소설’이 아닌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소설을 쓴다. ‘사건’의 자리에 관성처럼 ‘혁명’이라는 이름을 기입할 때 그의 소설은 전형적인 후일담 소설이 된다. 그러나 그의 소설엔 혁명은 커녕 그때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추억조차 없다. 다시 묻자.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세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드러나 있는 ‘결여’가 아니라 은폐되어 있는 ‘과잉’이다. 무수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다만 제어되고 있을 뿐이다. 히로세 준의 표현을 빌자면 시작도 끝도 없는 일들이, 준안정 상태 자체의 지속으로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쓰루미 슌스케 외 지음, 윤여일 옮김, 『사상으로서의 3.11, 그린비, 2012, 248). 나는 지금 과장된 어법으로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를 분석하고 있는 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수한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태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제적 체계의 자기중독증(과잉)을 읽어야 한다.


                




이재웅의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 같이 무기력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모든 열정을 거세당한 채 무중력 공간에 내던져진 것”(「월드 피플」, 228)은 “노동과 대지를 거세당”(234)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본’(Grund)이 무너졌기 때문이라 바꿔 말해도 좋다. 대지가, 근본이, 근거가 무너졌으니 아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는 데도 인간처럼 살고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진짜 공포의 실체다. 끊이지 않는 사고를 ‘제어(진행)’함으로써 자가증식하고 있는 자본의 자기중독, 바로 그 집적물인 ‘도시’가 근본 없는 세계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것이 이재웅의 문제 의식이다. ‘3.11’을 재앙의 숫자이자 동시에 시대정신의 개안을 위한 공공 주파수임을 강조했던 한 논자의 말(임태훈, 『우애의 미디올로지』, 갈무리, 2012)을 떠올려보자. 이재웅의 소설을 지난 시절의 혁명을 추억하는 ‘(가짜) 후일담’ 프레임이 아닌 전지구적 자본제의 재앙을 다룬 ‘(진짜) 공포 소설’로 읽어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재웅의 소설을 후일담적 구조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의 소설들이 취하고 있는 후일담적 구조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후일담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 「절규」와 「1,210원」, 「전태일 동상」 등에서 후일담을 쌓고 있는 중요한 재료들이 한때 아름다웠던 순결한 시절이 아닌 인물들 간의 ‘뒷담화’라는 데 주목해보자. 지나버린 시절을 길어올리는 동앗줄이 ‘뒷담화’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뒷담화는 내부적인 결속을 도모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가령, ‘L’에 대해 주고받는 술자리의 대화 속에서 ‘나’의 감각이 ‘전장’과 ‘부상병’ 사이에서 형성된다는 점(“한시라도 빨리 적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부상병 하나를 곁에 둔 듯한 기분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절규」, 13), 이 감각이 뒷담화를 정당화 한다. ‘전장’과 ‘부상병’ 사이에 뒷담화가 있을 때 전쟁은 끝나지 않으며 부상병 또한 구출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병사’는 고립된다.


유년 시절 ‘L’을 붙들고 있던 기억이 비참한 생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던 “순결한 무관심”(41)에 있었다는 것, 타인의 비참함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까마득한 절망”(42). 그 감각이 가리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이 무너진 자리일 것이다. 인간다움의 붕괴를 목격 했던 지난 날의 기억과 오늘의 뒷담화가 겹쳐 있다. 요컨대 이재웅은 후일담을 ‘노스텔지어의 언어’가 아닌 ‘전장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1,210원」이 가리키는 것은 빛바랜 열망의 가격이 아니라 망실된 인간 존엄의 수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수치는 정확하게 승진을 위해 동료를 해고하는 ‘종익’의 삶의 감각을 가리킨다. 「전태일 동상」에서 조립된 뒤틀린 인간상()이 꼭 그와 같다. ‘수치’와 ‘비참’의 뭉치들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전태일 동상’은 연대가 불가능한 시대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10년 만에 모였지만 모두 고립되어 있을 뿐이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산다는 것이란 연대가 불가능한 삶을 조건을 의미한다.


이재웅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하나 같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자신의 말을 잃었거나 말을 빼앗긴 인간”(「인간의 감각」, 53)이라는 표현은 개인의 비참함이나 실패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보다 말을 빼앗긴 인간들이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조형되는 감각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이재웅이 감지하고 있는 ‘인간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불온한 응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무수한 ‘말들’인데, 그 말들은 상대에게 가닿지 못하고 실비집을 부유하다가 바스라져버리는 토막일 따름이다. 공사장에 옆에 딸린 실비집에 출입하는 이들로부터 쉼없이 말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대개가 불평이나 불만, 험담, 증오, 냉소, 허무라는 독백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출입하는 실비집은 공론영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독백들로만 점철되어 있는 탓에 모두가 고립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고립은 인간의 행위 능력을 박탈한다. 이때 남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압살하는 ‘노동’뿐이다. 노동자들이 저마다의 자아 속에 감금된 것, 실비집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토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감각」과 「월드 피플」의 ‘PC방’ 또한 게토의 다른 판본일 따름이다.


여러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노인’들의 특징 또한 말이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이 없기에 ‘행위’도 없으며 ‘관계’의 양식 또한 희박하다. 「안내자」나 「어느 날」의 ‘노인’은 얼핏 ‘조력자’처럼 보이지만 소설 속에선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노인’들은 단 한번도 삶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던 ‘주변부’적 인물이다. 그들은 ‘전태일 동상’처럼 수치와 비참으로 뒤틀린 채 겨우 서 있으며 ‘동상’과 같이 삶의 감각이 무뎌진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이재웅 소설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붕괴된 지반 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메타포라 해도 좋다. ‘노인’이라는 주변부적 존재는 차라리 이재웅 소설의 중요한 특징들을 담지하고 있는 표상이기도 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전지구적인 자본제적 체제로 인해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은 단지 특정한 인물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쉽게 가볍고 자극적인 소재를 취하거나 현실을 비상해버리는 환상에 의탁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삶의 문법으로 근기 있게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을 쓰고 있는 이재웅의 작가적 위치 또한 주변부적 존재의 위상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주변부의 역학을 담지하고 있는 존재란 역설적으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붕괴된 대지 위에서 조립되는 「전태일 동상」의 뒤틀린 ‘동상’처럼 원본은 아니지만 그것이 이미 ‘집합적 신체’라는 점을 주목하자. 일견 마모되고 좌절된 형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집합적 신체가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어서” “하나의 인간 건축물을 세우려”(「월드 피플」, 247)는 연대를 위한 도약으로 집약되기도 한다. 바로 이 기괴하게 뒤틀린 집합적 신체로부터 “괴물이 나타났다, 인간이 변해라!”(다카하시 도시오, 김재원/정수윤/최혜수 옮김,『호러국가 일본』, 도서출판 b, 2012, 25)는 다급한 메시지를 수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재웅 소설이 우리에게 타전하는 메지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 저마다의 존재들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이상한 음가와 음율”의 뒤섞임, 혹은 “이상한 짐승의 노랫소리”(「월드 피플」, 249)란 “언어를 통한 소통보다 더 더 강력한 어떤 소통, 말하자면 고통의 공명 자체를 통한 소통”이라는 것, 이를 통해 어쩌면 붕괴된 대지 위에 깃들어 있는 “잠재된 용기”(「안내자」, 100)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실천문학>> 2013년 봄호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