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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곁과 결 (1) : 설거지와 글쓰기

by 종업원 2014. 11. 10.

2014. 11. 10

 

 

한순간에 쌓아올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제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일상'이라는 세계. 그 세계를 붙들고 또 다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시간. 하루에 후라이팬을 세 번정도 닦다보면 좋은 후라이팬 하나가 한 사람의 삶에 꽤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끼를 꼬박 챙겨먹은 날, 마지막 한술을 채 삼키기도 전에 싱크대로 가 입안에 가득한 밥알을 꼭꼭 씹으며 설거지를 했다. 싸고 양이 넉넉한 세제를 풀어쓸 때마다 지나치게 많이 일어나는 거품을 매만지며 '이건 좀 너무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반복하다 베이킹파우더로 세제를 바꾸었고 후라이팬을 세 번 닦던 날은 세제를 쓰지 않고 설거지를 해보았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설거지 방식이었지만 이상한 확신이 나를 이끌었고 그날 나는 밥을 먹자마자 설거지를 하면 세제가 필요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다녀 간 뒤, 누군가가 이 집에 묵고 떠난 뒤 예외 없이, 마치 증상처럼 설거지 거리가 쌓인다. 미아처럼 홀로 남겨진 나는 한순간 무너져버린 일상의 잔해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함께 있던 시간이 예정대로 끝나버리고 홀로 남겨질 때 일상의 모든 것이 폐허처럼 보인다. 남겨진 것들, 그들이 남기고간 유일한 흔적이 잡히지 않는 문양으로, 영영 가닿을 수 없는 암호로 흩어져 쌓여 있고 나는 그 잔해들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끝내 폐허 더미로 만들어 그 안으로 침잠한다. 일상이란 매번 다시 시작 하는 것이며 그렇게 생활을 '원점'으로 돌리는 힘으로, 그 단호한 반복의 습관을 몸으로 내려앉혀 매번 다시 일어남으로써 일구어가는 것일텐데,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 빈자리를 쓸어내리며 그리워하다보면 어느새 일상이 무너져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다 자꾸 무릎이 꺾이고, 쌓이는 먼지에 발이 푹푹 빠진다. 곳곳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에 발목이 감겨 자주 넘어진다.

 

일상을 꾸리는 데 애를 쓰던 시간 속에서 나는 설거지와 글쓰기가 무척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밥을 먹은 뒤 응당 해야하지만 자꾸만 미루게 되는 설거지와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하고 나눈 이력들이 기록되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자꾸만 미루어져 처연하게 마모되어 가는 쓰지 못한 글들. 설거지를 하는 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것처럼,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그 공평함의 조건이 외려 설거지라는 일상의 행위가 애써 조형해가는 단단한 가치인 것처럼 일상의 글쓰기 또한 특별한 기술을 요하지 않되 홀로 어울림의 시간들을 되새기며 글쓰기라는 노동을 통해 언제라도 마모되고 파괴될 수 있는 '함께라는 세계'를, 그 연약하고 기약할 수 없는 세계를 지키고 버텨내는 일임을 알게 된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쓸고 닦는 반복의 힘, 매번 다시 시작하고 다시 일어나는 '원점의 동력'으로 일상을 일구고 지켜내는 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써내려가는 글쓰기의 습관을 연마하는 바로 그 몸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손안에 잡아두기는 힘들지만 허망하게 날려보내는 것은 너무나 쉬운 것들이 있다. 애써 그러잡지 못하고 힘없이 놓쳐버리는 일을 반복할 때 일상은 폐허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폐허 더미 속에서 홀로 살아가게 된다. 폐허는 가장 먼저 결(texture, 紋)을 파괴하지 않는가. 일상이란 결국 삶의 결을 지키고 새기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써두고자 한다. 삶의 결은 곁(beside, 傍)의 사람들과 함께 새기고 다지는 공동 작업이다. 다급해진 몸은 쉽게 지친다. 밥알을 입안에 넣고 하는 설거지는 일상에 내려앉지 못한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또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애써 '힘'을 쓰다보면 '흥'이라는 오래된 동료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우리를 도울 것이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문턱들을 힘으로 무너뜨리지 않고 흥으로 넘을 수 있게 우선 힘을 좀 내야 할 일이다. 설거지와 글쓰기. 내가 나를 버티고 일으켜세우는 힘으로 곁의 사람들과 함께 삶의 결을 새기는 일에 흥을 내야 한다. 팔굽혀펴기를 중단하지 않는 생활을 지켜나가는 것으로부터 힘을 내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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