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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다-함의 비극

by 종업원 2014. 11. 16.

2014. 9. 21 / 11. 12


_남천동 2012. 6~2014. 9

 

2년 넘도록 '지독'하게 살았던 남천동 집에 대한 기억을 좀처럼 회집할 수가 없다.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어서 그럴까, 주변의 으리으리한 집들 사이 볕이 잘 들지 않던 그 낮고 어두운 기운에 짓눌려서일까, 가난해서 하찮은, 하찮아서 가난해져버렸던 어떤 끝이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내게 행복을 허락'하기 위해 날개짓을 하듯 사뿐히 내려 앉은 이 집에 더러는 누군가가 왔다갔고 함께 밥을 지어먹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내가 사는 집을 돌보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러한 요청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늘 어지러웠고 그 어지러운 흔적들을 정리하면서 이 집의 가난함을 매번 대면해야 했었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어지러움 속에 이 집에 살고 있는 나를, 이 집에서 살아갈 나를 생각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은 며칠을 묵어 가기도 했고 몇몇은 닭튀김을 먹었고 몇몇은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고 가기도 했다. 좀처럼 틀지 않는 보일러를 밤새 가동하고 잠자리까지 내어주었건만 문까지 활짝 열어두고 말없이 가버린 이도 있었고 새벽에 깜짝 방문해 자고 있는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던 이도 있었다. 며칠을 집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 집앞까지 와 문을 두드려 나를 깨우는 이도 있었다. 그들이 오고 갔기에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 있으니 그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도망치듯 숨어들었다는 것이 도망치듯 떠나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련만 나는 도망치듯 이 집을 떠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2009년부터 시작된 내 독립 생활은 도망의 연속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도피가 아닌 '의지로서의 도망'을 희망했고 지금 그 의지가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단박에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들이 내 삶을 휩쓸었다. 당위들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희망과 같은 것이어서 나는 그것을 동력 삼아 애써 관계를 맺으며 삶을 밀고 나갔다. 만나기 위해서 자꾸만 떠나야 했던 곡절, 삶을 버텨내기 위해선 자꾸만 떠나야 했던 곡절을 반복하고 또 넘어가면서 말이다. 5년을 지나고 있는 독립 생활은 그 곡절을 유별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에 기대어 그 당위들을 실천했고, 그렇게 도망의 의지를 밀고 나갔으나 꿈쩍도 않는 당위만이 여전히 자리에 있고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세계로부터 피신해 들어와 지친 몸을 뉘였던 곳. 볕이 잘 들지 않고 무척이나 추웠던 곳. 왠만큼 쓸고 닦아선 표도 나지 않던 곳. 그런 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필사적으로 원룸을 피했고 애써 살림을 꾸리고자 했지만 내 살림이란 게 늘 누가 볼까 민망한정도였다. 집에 관한 내 희망은 언제나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이었지만 도망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는 삶이니 꾸리고 있을 세간은 보지 않아도 뻔하지 않겠는가. 애를 쓴다고 썼지만 늘 집에게 미안했고 집에서 민망했다. 그런 곳을 옮겨다니며 애써 살았다.       

 

매만졌던 곳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 닿은 손길마다 벌어진 상처투성이다. 끝내 보살핌을 누리지 못한 그 집을 떠나며 이사가 완벽한 죽음체험이라는 말을 애써 떠올려봐도 아무래도 나는 그 집에서 죽지 못한 것은 아닐까. 숨을 참는 것과 남김없이 내쉬어 더 이상 숨을 들이마실 수 없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일 테니. 텅 비어버린 그 집에서 나는 참았던 숨을 가쁘게 내쉬듯 집안 곳곳의 장판 모서리를 들추며 이사 들어올 때 한움큼 뿌려둔 굵은 소금을 찾았다. 이사 들어가는 집의 액운을 쫓기 위해선 반드시 굵은 소금을 장판 밑에 넉넉하게 넣어두라는 내 어머니의 당부에 따라 놓아 두었던 단단하고 빛나던 소금을 어쩐 이유에서인지 짐을 싸는 내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잘 있는지보단 그것이 정말 거기에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 안부라면 정말 거기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미련에 가까운 일일 테다. 급기가 나는 오직 그 소금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짐을 싼다는 마음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유난히 습기가 많은 집이기도 하거니와 2년전에 놓아두었던 소금이 아직 남아 있을리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 소금을 다시 보려고 했을까. 무엇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금이 놓여 있던 자리. 얼룩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 자리를 찬찬히 눈으로 훑으며 그 부재의 공간이 온몸에 내려앉는 묵직한 허함 속에서 작게 되뇌었다. 다-함. 남김없이 다 하였다는 말. 결코 보람으로만 안착할 수 없는 말. 그렇다고 무작정 회한으로 기울게 지켜보고 있을 수만도 없는 말. 다-함을 뒤로하고 남천동 그 집을 나왔다. 뒤로 하고 나올 때라야만 다-함을 그곳에 남겨둘 수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떠날 수 있었다.

 

'다-했다는 것'은 남김 없이 사라졌버렸다는 사태만이 동일할 뿐 다-함의 결과 온도가 저마다 다르다는 데서만 그것의 비극과 마주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집이 다한 것과 그 집에 잠깐 살았던 내가 다했다고 말할 때 우린 같은 다-함의 사태 속에 있지만 그것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집에 오랫동안 살고 정성을 다해 돌봤다고 하더라도 다-함이라는 사태를 막을 수 있기는 커녕 집의 다-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함이란 결국 ‘어긋남'의 현실, 의도의 어리석음, 그 이치와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 살았지만 집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 어쩌면 집과는 무관하게 집에서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런 이유로 다-함이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어긋남과 대면하는 순간이란 어긋남의 시작점이 아니라 어긋남의 종착점,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음을 인지하는 지점이니 다-함의 비극이 바로 거기에 있다. 장판 아래에 놓아두었던 소금이 소리도 뒤척임도 없이 온전히 녹아내린 것처럼 다-함은 흔적 없이 다만 어리석다.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을 때라야만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을 하는 것, 당면한 그것에 정성을 다하는 것. 정성이란 결코 그 자리에 남아 있어주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을 잘라 무언가의, 누군가의 시간을 데우기 위해 장작처럼 만들어 아낌없이 불태우는 것이니 정성은 언제나 남김이 없다. 액운을 쫓기 위해 사람보다 먼저 발을 딛은 굵은 소금처럼 남김없이 사라져버리니 그곳에 살았던 이만이 그 다-함의 목격자다. 슬픈 일은 그 목격자가 등을 돌려버릴 때 다-함의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도리없어져버린다는 데 있다. 다-함의 비극,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이 있다면 어긋남의 그 종착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어김없이 도착한다는 것이다. 다시 '다-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지금 내가 답하지 않고서는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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