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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꿈―오마주

by 종업원 2014. 12. 2.

2014. 12. 2



써야할 문장을 쓰지 못하고 버티다 지쳐서 쓰러진 잠, 꿈을 꾸었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다 호기롭게 말하곤 하는 편이지만 억압된 것들의 귀환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극장이었다. 정성을 다해 만든 것처럼 보이는 잡지가 있었고 스크린 쪽에선 정성일 선생께서 강연을 하고 계셨다. 꿈 속에서 보는 정성일 선생, 꿈이라는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정성일 선생의 육성(肉聲). 아직 한번도 실물로 뵙지 못한 정성일 선생의 모습-이라기보단 그 목소리의 생생함으로!-을 꿈 속에서 뵈었다. 아마도 이 강연을 기획한 주최자로 여겨지는 이의 질문이 길게 이어졌다. 질의응답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이 질문자는 정성일 선생의 말을 잘라 먹으며 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질문이란 게 1994년 MBC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에서 정성일 선생이 한 말들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그녀는 20분 간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을 정도의 호흡으로 질문-강연을 이어갔고 청중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성일 선생은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 급기야 객석으로 돌아가 앉아버리기까지 했는데, 모두가 저 질문자가 하고 있는 말이, 단어의 악센트와 말의 성조까지 모조리 1994년 정성일 선생의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스미 시게이코의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언급을 들으며 나는 이 긴 질문이 끝난 후 오늘 이 극장에서 나온 모든 말이 정성일 선생의 것임을 밝힌 뒤 단 하나의 문장을 전하고 싶었다. "당신의 건강을 지켜주세요. 언제까지고 극장에 와주세요. 당신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당신을 잘 지켜주세요." 그 말을 전하지 못하고 나는 꿈에서 깨었다. 눈을 뜨니 8시, 2시간 남짓 잠들었고 휴대폰에선 정성일 선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2004년 1월 7일 방송, '시네필 문화'에 관한 내용이었다. 질문자가 그토록 정확하게 정성일 선생의 말을 읊을 수 있었던 것은 꿈-밖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을 내가 고스란히 꿈-안으로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일 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를 들으며 잠들었다. 정성일 선생의 속사포 같은 말들이, 그렇게 다급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내 가난한 잠을 지켜주었다. 염원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위한 잠이 그렇게 지켜졌는지도 모르겠다. 100일동안 듣기만 하고 전하지 못한 단 한마디의 말을 꿈-스크린을 통해 겨우 전할 수 있었다. 내가 연출한지도 몰랐던 꿈속의 짧은 장면. 당신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 꿈-스크린 속에서 내가 당신께 전하려고 했던 그 말은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했다. 영화에 관한 당신의 전언이 늘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니 당신들이여, "지금 당신(과 곁)을 잘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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