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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일관성 : 무용(無用)함의 쓸모

by 종업원 2015. 1. 12.

2015. 1. 11



볕이 좋아 잠깐 걷다가 돌아올 요량으로 나선 산책이 긴 산보(山步)로 이어졌다. 지난 번 장군산로를 따라 올라간 길목에선 산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여러 갈래였지만 잘 닦인 암남공원로를 따라 올라간 길목에선 소나무가 우거진 등산로가 눈앞에 있음에도 진입로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해운대나 광안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송도 해변을 향해 뻗어 있는 고층의 아파트가 즐비한 암남공원로의 사잇길을 이리저리 헤매기를 한 시간, 오기가 생겨 길찾기를 그만두고 무작정 산쪽을 향해 길이 아닌 덤불 속으로 들어섰다.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생각과 달리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이기도 하다. 두껍게 쌓인 낙엽에 발이 깊게 빠졌고 크고 작은 나무 가지들을 헤치고 올라가는 급경사의 둔덕에서 호흡이 턱까지 차오르는 긴박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길을 코앞에 두고도 길을 잃을 수도 있겠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앞의 것을 잡으려 할 때, 그러나 그것이 잡히지 않을 때 사람은 그렇게 속절없이 다급해진다. 허리정도 밖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뛰어든 계곡물이 목까지 찰 때 서둘러 밖으로 나가기는 커녕 그 자리에 붙박혀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급기야 들짐승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과잉된 생각까지 하게 이르렀는데, 졸지에 길잃은 들짐승 꼴이 되었던 것. 꼭 산길이 아니더라도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금새 숨이 턱까지 차버리는 상태로 가파르게 미끄러지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일 게다. 사람의 흔적을 피해 산길로 들어섰건만 외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생각지 못한 다급함과 마주한 것. 


한바탕 쇼를 하고 진입한 길이어서일까, 인적 드문 호젓한 산길이 꽤나 운치 있어 두 시간을 넘도록 걷고 또 걸었다. 이럴 때 곁에 함께 걷는 벗이라도 있으면 두런두런 이야기라도 나누련만, 늘 그리운 한 친구가 내게 이르기를 걸을 때 내 말이 더 좋아진다고 했으니 홀로 걷는 이 산길이 아쉽기만 하다. 허나 길이 아닌 길을 타도 들어온 탓에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괜한 염려가 들정도로 걷는 맛이 적지 않았고 이곳 저곳 어지럽게 발을 옮기며 마음이 내키는대로 걸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즐거움 또한 컸으니 혼자면 또 어떤가. 이 땅의 모든 명당은 초소 차지라는 한 시인의 언급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장군산의 정상엔 군부대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어 더 올라가지 못하고 발길을 옆으로 옆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솔잎 사이로 비치는 겨울 햇살을 내리쬐며 좁고 희미한 길을 걷는 운치가 흡족할만 했다.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는 기괴할만큼 거대한 냉동창고중엔 산중턱에서도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거대해보이는 것도 있었다와 오리고기나 닭백숙을 파는 식당, 뜬금없이 즐비한 모텔들을 등뒤로 하고 천천히 걸으며 떠오르는 한문장 한문장을 멈춰서서 수첩에 옮겨적기도 하고 한 두 단어를 나직하게 되뇌어보기도 했다. 대숲을 지나 누군가가 투박하지만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다가 새삼 다리를 꼬지 않고 앉는 버릇을 지켜온 시간이 2년을 훌쩍 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앉을 때 다리를 꼬지 않은 버릇을 의식적으로 지켜온지 2년이 더 넘었겠지만 그 버릇을 조형한지 1년을 지나면서 별다른 생산성이 없음을 인지하고 나서부턴 기간을 잊어버리고 있던 터였다. 대면하고 있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몸의 태도를 가질 요량으로 무턱대고 시작해본 것이 꽤 긴 시간이 흐른 셈이다. 자세를 곧게 하지 못하고 몸을 배배꼬는 습성은 다리를 꼬지 않는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님을 알곤 그간 아무짝에도 쓸모 없은 버릇을 가지기 위해 요란을 떨었구나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것과 상관없이 줄곧 다리를 꼬지 않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 버릇이 몸에 내려앉아 다리를 꼴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다리를 꼬지 않는 게 더 편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전히 무의식 중에 다리를 꼬기 위해 한쪽 다리가 올라가며 그때마다 들었던 다리를 다시 내려놓고 양 무릎과 허벅지가 맞닿을 정도로 힘을 주어 앉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전처럼 딱히 어떤 생산성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무용한 버릇을 무용한지 알면서도 지속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쓸모를 알아차리게 된다. 일관성이라는 게 지며리 일매진 태도를 견지하는 것을 통해 조형할 수 있는 것일 테지만 자동반사적인 것이 아니라 매번 다시 선택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무용한 버릇을 통해 새삼 다시금 새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렇게 해보는 것'이 일관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갈래가 될 수 있다면 일관성의 생산성이란 어쩌면 아무런 생산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계속 해보는 것 속에서, 바로 그 무용(無用)함을 통해서 가닿을 수 있는 쓸모의 발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일관성의 가치라는 게 어디 다리 꼬지 않는 하찮은 버릇에만 있겠는가. 세속적 가치 속에서 무용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거듭 계속 해보는 태도가 길어올리는 아무런 생산성 없는 생산. 어떤 글쓰기가, 어떤 노동이, 어떤 관계야말로 오래 전에 그 기간을 잊은 일관성의 요체라는 것이며 정작 우리의 삶을 무심히 지키고 있는 것은 그 무용한 일관성이라 바꿔 말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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