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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선물하기로써의 글쓰기

by 종업원 2015. 1. 19.

2015. 1. 19




꾸역꾸역 써왔다. 안 써질 땐 스스로를 벼랑까지 몰아부쳐 쓰지 않으면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바둥바둥거리며 썼고 드물게 잘 써질 땐 이렇게 써도 되는가, 거듭 자문하며 마침내 닥달하는 심문에까지 이르게 하고서야 더디고 더디게 썼다. 문학평론으로 등단했으니 도리없이 문학평론을 써야했고 문학평론가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보였다. 어떻게든 써야했기에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해도 이 또한 글쓰기이니 어찌 기쁨이 없었겠는가. 헌데 기쁨의 순간은 잠깐이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게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불황 속 실직자처럼 일거리가 있으면 어떤 일인지 묻지도 않고 보수를 따지지도 않고 수락부터 했다. 원고 청탁은 내게 선택이 아니라 통보나 명령처럼 도착했다. 그리곤 다시 꾸역꾸역 썼다. 


청탁 원고를 쓴다는 게 불황을 먹고 사는 구조와 닮아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나 실은 우리네가 놓여 있는 세계 전체가 위기와 파국에 기생하고 있는 꼴이니 성찰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아둔한 각성쯤 되겠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에 트랙을 긋고 오랫동안 홀로 뛴 것만 같다. 시합에 나가고 싶었다. 정식 경기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트랙을 돌며 한판 승부의 놀이를 벌이고 싶었다. 출발선이 다른 곳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동기부여로 전환한 것에 만족하며 '생활없이'(비평가의 시민권)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뛰고 또 뛰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부지런히 뛰었으면 먼저 달려나간 다른 이의 뒤통수라도 보일 건만 그 조차 보이지 않았다. 경기에 참여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질문엔 답할 수 있어야만 했다. 나는 누구와 함께 뛰고 있는가. 바꿔 말해 나는 누구와 함께 쓰고 있는가. 그것이 왜 꾸역꾸역 쓰는가에 대한 유일한 답변일 수도 있었기에 절실한 심정으로 청탁 원고를 수락하는 것처럼 나는 함께 쓰고 있는 이를 찾았고 그/녀를 부여잡기 위해 '애를 썼다'. 꾸역꾸역 쓰다보니 카드 돌려 막기처럼 왜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도, 쓰는 목적도,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도 점점 더 다급하게 기울어져 갔다. 후퇴인지 전진인지 알 수 없는 파도에 휩쓸려서도 나는 계속 썼다.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가라앉지 않을 것, 계속 손과 발을 저을 것. 그것이 내 수영법이었다. 어쩌면 내 글쓰기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탈고(脫稿)란 숙변(宿便)을 밀어냈을 때처럼 기쁜 일이다. 그렇다고 탈고가 숙변이 쌓이는 구조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 몸속에 변이 쌓이는 고질적인 문제엔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꾸역꾸역 쓰는 것, 용을 쓰고 밀어내는 수밖엔 없었다. 작년, 등단 이후 처음으로 원고 펑크를 냈다. 한번이 두번으로, 두번이 세번으로 이어졌다. 게을렀던 적 없었지만 원고 펑크를 냈으니 나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이어야 했다. 애를 써서 읽고 썼지만 결과는 원고 펑크였다. 그 와중에 몇편의 글을 쓰기도 했고 더러는 이전과는 다른 기쁨을 주는 탈고도 있었다. 반성과 자책으로 나를 호되게 몰아부쳤지만 조금 덤덤, 조금 담담, 그렇게 조금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밤 이번 계절 청탁 받은 원고를 쓰기 위해 소설을 읽다가 이 작가들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하나라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글이 안 써지는 이유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타고 어쩌면 '이런 글'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스스로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비밀 앞에 돌연 당도한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빈 트랙을 돌고 싶지 않다. 그렇게 꾸역꾸역 쓰고 싶지 않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든,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을 만나든, 어제 만났던 사람을 오늘 다시 만나든, 말에 관해서만큼은 나는 풍족 하다. 사람들에 관해서라면 해주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제는 웬만큼 이야기를 지긋이 들어주기도 하고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말을 아껴야 하는 순간에 대해서도 자주 인지하고 있다. 영화든, 연극이든, 음악이든, 회화든, 설치든, 다원예술이든 생소한 매체를 접해도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말들을 길어올리는데 용을 쓰지 않아도, 꾸역꾸역 쥐어짜내지 않아도 될정도로 어떤 자연스러움이 몸에 내려앉은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내게 가장 익숙한 것이라 할만한 문학평론을 쓸 때마다 어떤 곤혹스러움과 대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15개월 간 매달 사람들과 어울려 <문학의 곳간>을 열며 '별강문'이란 것을 빠지지 않고 썼다. 무척이나 즐겁고 기쁜 글쓰기였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글쓰기라면 평생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만큼 충만한 작업이었다. 왜 쓰는가, 누구와 함께 쓰고 있는가가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다시 트랙 위에 서서 질문하게 된다. 누구와 함께 쓰고 있는가. 기왕이면 잘 달리고 싶지만 승패와 우열을 가리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다. 설사 꼴찌를 하더라도 정직하게 하고 싶다. 트랙을 내 호흡으로 완주 하고 싶다. 그동안 숱한 청탁 원고를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한적 있는가?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다르다. 청탁 원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때와 달리 내겐 그만큼 중요한 일들이 여럿이며 무엇보다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글쓰기를 삶에 내려앉히는 것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다시 어리석은 방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다. 상대가 누구이든, 대상이 무엇이든 펑크 내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곁에 있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어떤 매체에 실리는 글이든 함께 하고 있는 이들에게 선물로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선물하기로서의 글쓰기. 이번에도 마감 기한을 지키긴 힘들 거 같다. 꾸역꾸역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선물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변명해도 좋을까. 그런데 작가에게도, 편집자에게도, 내 동료들에게도, 또 나에게도 선물이 될 수 있는 그런 글이 세상에 있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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