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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이름없는 세상의 모든 길

by 종업원 2015. 1. 18.

2015. 1. 17. 

 

 

 

같은 길이어도 걸음만큼은 같을 수 없다. 걸음이 다르니 자연히 길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볕 좋은 날 걸었던 산보와 사뭇 다른 처연한 기운에 휩싸여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를 한 시간. 걷기를 그만두고 늦은 오후 나리쪼이는 겨울볕에 검고 습한 얼굴을 내맡겨본다. 결국 이 뒷산의 길 또한 뻔한 것이어서 몇번 오지 않았지만 다 알듯하다. 이내 틈입하는 뻔함과 시시함. 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걸음을 가리키는 것이겠다. 좀처럼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기어이 안으로 머리를 처박은 채 여기저기를 뒤뚱거리며 금새 다 알겠다는 푯대를 세우는 탓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걷기를 멈출 게 아니라 더 부지런히 움직여 그 뻔한 자아의 걸음을 벗어날 일이다. 산길만 고집할 게 아니다. 한사코 잘 닦인 도로쪽으론 내려가지 않았지만 동일한 패턴의 걸음 밖으로 나가볼 요량으로  차량만 다니는 길로도 나왔다가 다시 숲으로도 들어서고 가파른 언덕길로 위태롭게 내려가다 다시 인적이 닿지 않았던 길로 들어서 내처 걷기를 두어시간. 멀리서만 보던 감천항 냉동 창고길을 걷다보니 여기까지가 서구이니 안녕히 가시라는 이정표를 지나가게 된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매섭게 불던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사위도 어둑신해져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잠깐 들었지만 이대로 돌아서면 이 길 또한 뻔한 길이 되지 않겠나. 간간이 지나다니는 레미콘 트럭말고는 인적이 없어 더 음산한 냉동창고 뒷길을 더 걸어가본다. 가도 좋고 가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는 이 길, 이 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어두워져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처럼 평범한 어휘 하나가 멜로디처럼 떠오른다. 친구에게 가는 길. 애인에게야 가장 빠른 지름길로 가야할테고 선생에겐 몸의 매무새가 흐트러지지 않을정도의 길을 선택해야 할 터. 돌고 돈 탓에 늦고 어두워진 길 위에서 세상의 이름없는 길들이 결국 친구에게로 가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빠른 길도, 밝고 넓은 길도 아닌 빙빙 돌아 가는 탓에 무용한 길, 다시 찾을 수도 없는 특징도 이름도 없는 길. 충분이 헤매고 어리숙하게 돌아가도 넉넉한 이상한 길. 친구에게로 가는 길. 이 좁고 가난한 길들이 모짝 그런 걸음으로 만든 길이 아닐까. 산능선을 타고 내려와 당도한 낯선 동네 입구 앞에서도 걸음이 밝은 건 곧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볕은 없지만 친구에게로 가는 걸음이 등불을 켜고 걷는 길. 아, 세상의 모든 길은 친구에게로 가는 걸음이 만든 것이었구나! 이국처럼 낯선 감천동에 친구가 살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내 걸음은 벌써 나를 벗어나 저만치 홀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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