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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용접하는 '현장'

by 종업원 2015. 3. 18.

2015. 3. 18




“예수의 민중의 현장과 복음서를 쓰고 있는 사람의 현장이 유리가 안 됐다는 거지요. 즉 마르코는 지금 자기자신의 얘기를 울면서 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동시에 예수의 얘기다 그거예요. 그 현장이 아니었으면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못썼을 거다 그거지요. 마르코 자신의 현장이 예수의 현장을 똑바로 보게했던 거죠. 우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오늘의 현장이 텍스트의 그 현장을 보게 만든 거죠. 이것 없으면 저것이 안 보이는 거죠.”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90, 72쪽.


 

'텍스트(성서)와 컨텍스트(현장)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안병무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목. "우리가 역사 속에 속해 있으면 역사를 객관화할 수 없듯이, 내가 나의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를 읽을 때에도 컨텍스트나 텍스트를 객관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69쪽) 텍스트(성서)와 컨텍스트(현장)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라는 태도는 마르코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울면서 써야 했던 이유와 겹쳐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방으로 배회해야만 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아픔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은 지금의 고난이 예수가 겪었을 고난의 현장과 다르지 않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깨달음과 함께 온다. 오늘의 현장 없이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텍스트 없이는 오늘의 현장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1972년 <예수와 민중>이라는 짤막한 글에서 안병무는 민중의 고난을 한 개인의 고난으로 보지 않고 집단적인 고난으로 보았다. 군사독재 속에서 체포되고 고문 당하는 사람들이 안병무에겐 집단이 당할 고난을 한 사람이 대신해서 당하는 것으로 보였다. 독재 아래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름, 민중.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한 해답을 성서에서 찾다가 발견한 것이 '오클로스'라는 이름이었다. '권외(圈外)에 있는,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이름. 고난의 '현장'에서 울면서 쓴다는 것은 끝내 현장에 버티고 서서 세상을 지킨다는 것이다.

 

'인간 선언'을 외치며 청계천에서 남김없이 불타올라 재가 되어버린 전태일의 삶에 '몸'을 주고자 했던 변호사 조영래 또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지금 자신의 이야기로 울면서 썼을 것이다. 조영래는 전태일의 수기를 읽었고 그것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써야만 했을 것이다. 전태일이 겪었던 고난의 일지가 조영래가 살고 있는 세상의 고난을 남김 없이 비추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서 있는 현장을 똑바로 보게 했을 것이다. 도저한 고난 속에서, 여전한 고난의 연대기 아래에서, 권외에 있는,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이 끝내 버티고 서서 지켜낸 '현장'에서 전태일과 조영래는 만난다. 조영래 앞에 나타난 전태일의 재림. 전태일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난 속에 있어야 했던 '오클로스-민중'의 이름이다. 재림이란 용접된다는 것이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뜨겁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읽고 쓰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 용접하는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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