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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마-알간 시

by 종업원 2015. 1. 21.

2015. 1. 21




          


당신의 아내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의 아내는 화를 잘 내지요

요리를 급하게 해치우곤 하지요

울었다가 금방 풀렸다가 하지요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단 것도

내가 도무지 아내 역할을 잘 못한다는 것도

그치만 나는 당신 곁에 사는 사람

나는 당신과 살면서 나를 알아가지요


-김연희, 『작은 시집』, 꾸뽀몸모, 2015






섬광처럼 도착하는 것. 그것이 시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서성이고 서성여야 하는 것, 시 안으로 성급히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그 주변에서 기웃거리거나 멀찌감치서 감탄하는 것. 그것이 시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기다림이 가닿을 수 없는 거리. 시의 진실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김연희의 『작은 시집』 앞에서라면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 시집엔 한 순간에 내려치는 섬광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시를 읽는다는 게 장롱을 열어보거나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먼지를 털고 방바닥을 닦는 일처럼 김연희의 시편들은 꾸밈이 없다. 늘 하던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특별히 두드러질 것 없는 어휘들로 시를 쓴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아직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닮아 있고 평범하기 이를 때 없는 남편의 등을 닮아 있고 네 식구가 곤히 잠든 방에 차오르는 높낮이가 그리 다르지 않은 곤한 숨소리를 닮아 있다. 


장롱을 열고, 냉장고 문을 열고, 바닥을 쓸고 닦고, 아이를 바라보고, 남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이고, 가끔 화장실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 섬광과 구원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가 아니라 매일매일 작고 작은 일상이 장롱 속에서, 냉장고 속에서, 아이 얼굴 속에서, 남편 얼굴 속에서, 화장실 거울 속에 담긴 내 얼굴 속에서 보이는 것들을 한 자 한 자 옮겨적은 시. 일상을 꾸린다는 것이, 생활을 지키고 가꾼다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그 섬광 같은 사실을 김연희의 두 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섬광은 저곳으로부터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부터 이곳에 벌써 와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숨소리가 작은 방에 한 가득 할 때 잠깐 맺히는 것. 겨울 나무 가지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열매가 바로 그 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열리는 것. 꾸밈없이 반짝이는 신비로운 시들로 가득한 시집. 네 식구가 살고 있는 집처럼 작지만 여문 시집. 시인 김연희 씨가 『엄마 시집』(꾸뽀몸모, 2013)을 펴내고 이어서 쓴 시들을 다시 묶은 시집, 『작은 시집』. 


그 생활이 마-알게서, 그 마음이 마-알게서, 그 얼굴들이 마-알게서, 이 시들도 마-알갛다. 엄마가 아이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춰보는 것은 아이의 얼굴이 꾸밈없이 말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마-알간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엄마의 얼굴 또한 마-알갈 수밖에 없다. 마-알간 아이의 얼굴이 한시도 지루해 하지 않고 엄마의 얼굴을 비출테니,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마다 마-알간 얼굴이 맺힐테니 그 얼굴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엄마의 얼굴도, 남편의 얼굴도 마-알갛게 영글어갈 것이다. 마-알간 아이와 마-알간 엄마가 마주볼 때, 마-알간 얼굴로 세상을 바라볼 때, 작은 빛이 나리라. 그 주변으로 따뜻한 온기가 퍼지리라. 그 빛을 먹고 아이는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리라. 그리고 엄마는 다시 시를 쓸 것이다. 이 작은 기도와 같은 시집을 읽으며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 올리고 싶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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