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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다정함의 물결 무늬

by 종업원 2015. 3. 19.

2015. 3. 19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김태정, 「물푸레나무」 전문,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퇴근하는 버스에서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읽고 한참 넋을 놓다. 고작 네 시간임에도 온몸에 진이 빠져버린 것은 뒷자리에 앉아 심드렁하게 졸고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깨우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일까, 고작 졸고 있을 뿐인데, 고작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관심한 표정으로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손 내밀어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는 무력함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배우도 아니면서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뮤지션도 아니면서 연주를 하는 뮤지션처럼 애를 써 남김없이 소진해버렸기 때문일까.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펼쳐든 시집 속에 오랫동안 외롭게 고여 있던 처연한 마음이 도리없이 스미는 순간. 

 

서울을 떠나 낯선 곳으로 내려가야 했던 시인의 사정을 알지 못하지만, 젊은 나이에 덜컥 암을 얻어 쓸쓸하게 잠들어야 했던 사정도 알지 못하지만, 한번도 보지 못한 풀푸레나무를 떠올리며, 짐작하며, 더듬으며 썼을 구절들이 늦은 오후 흔들리는 버스 뒷자석까지 물결쳐 오는 듯하다. 사십이라는 나이, 타지 생활, 병. 사력을 다해 살아왔을 젊은 시절이 남긴 것이 그 뿐이겠냐마는 사력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이 가끔은 남김없이 소진해버렸음을 마주봐야 하는  형벌로 도착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음을 짐작하게 된다. 잡을 수 없는 것들을 잡기 위해 뛰었던 발돋음과 애를 써서 세웠던 까치발, 점점 우악스러워지는 아귀힘, 그렇게 홀로 아귀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못난 느낌.

 

발돋음을 멈추고, 까치발을 세우던 애씀을 내려놓고, 아귀힘을 풀고 바라보는 세상. 파르스름한 빛은 분명 온통 멍든 것만 같은 푸르스름으로 도착했을 것이다. 격정이 잦아진 뒤 온몸이 멍투성이임을 마주해야 할 때, 쥐었던 아귀힘을 풀 때 스르르 빠져나가는 어떤 의욕에는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맹렬하게 내리쬐던 태양, 종일토록 이 악물고 쥐고 있던 힘을 풀자 서서히 저녁 어스름이 찾아온다. 겨우 허락된 가난한 마당에 비로소 저녁의 어스름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스름 하다'는 것. 쥐었던 힘을 풀 때 비로소 스르르 빠져나가는 의욕과 가질 수 없던 세상으로부터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처연한 슬픔의 무늬.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를 파르스름한 빛깔. 그 빛깔은 물들이고 물올리며, 잔잔하고 찬찬히, 그렇게 다정하게 스미는 세월의 물결 무늬이자,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체하지 않게 등을 다독거려주"는 연인들이 지워지지 않는 서로의 멍을 쓰다듬고 매만지며 서로가 견뎌내야 했을 그 세월을 스미듯 타고 넘나드는 손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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