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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다시 만나 같이 살기 위해

by 종업원 2015. 2. 14.

2015. 2. 14

 

 

 

새벽, 인터넷으로 구매한 책들 사이에 끼어온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 2015)의 한 챕터를 읽으며 한참을 울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내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도 없었다. 수첩과 같은 형태로 배송된 짧은 글뭉치는 내게 눈물을 흘린다는 게 슬픔이 최고도로 유지된 상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운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거나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과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 어쩌면 웃음처럼 일상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다만 웃을 뿐 우는 데 인색할 따름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언제나 무언가를 고백할 때나 진정성 따위를 증명할 때만 동원될 뿐이다. 오직 나에게만 특별한 일이었던 것이다. 눈물은 그런 게 아니다. 아이를 잃은 비통함과 절망 속에서 삶을 버텨내고 있는 살아남은 이들의 말을 따라가며 눈물을 흘린다는 게 그저 사람임을 알리는 최소한의 신호라는 생각을 했다. 웃음과 눈물을 애써 같은 자리에 놓아둘 수 있을 때 운다는 행위가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이 있다는 증표로, 미소가 그러한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 있기에 힘이 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황망하게 떠나버린 아들 호성이가 자꾸만 "엄마, 뭐해?"라는 목소리로 한없이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깨울 때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돌아다닌다는 엄마. 우는 것이, 눈물이 도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한 마디의 말.

 

 

"호성아, 너도 거기서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 돼. 엄마도 착하게 살아야 너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우리 꼭 다시 만나자. 나는 너를 꼭 다시 만나서 같이 살고 싶어. 엄마 열심히 살아볼게. 지켜봐."

―「엄마하고 나하고는 연결되어 있잖아, 그래서 아픈 거야」, 135쪽.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산다는 것은 운다는 것이다. 동시에 웃는다는 것이다. 울면서 웃고 웃으면서 운다는 것이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게 살아야 다시 만날 수 있다. 호성이 엄마는 호성이와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 하나를 하기 위해 착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이 모든 게 '같이' 살기 위해서다. 비통함과 절망 속에서도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같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웃음도 눈물도 같이 살고 있다는 증표이며 같이 살겠다는 약속과 다르지 않다. 산다는 것은 같이 살아내는 것이다. 다시 만나 같이 살고 싶다는 염원이 지켜지는 세상. 산다는 것이 결국 누군가를 다시 살리는 일임을 알게 된다. '같이'라는 부사를 저마다의 '산다' 곁에 놓아두는 일. '같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사가 아니라 반드시 '산다' 곁에 있어야 함을 알리고 그 자리를 지키는 일. 누군가의 비통함과 절망 곁에서 함께 운다는 것이 그 이치를 밝히는 작은 등불임을 알게 된다. 언제 꺼질지 알 수 없는 미약한 등불을 잠시 켜는 일. 울음의 등불을 함께 켜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