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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너무 일찍 쓰인 글

by 종업원 2015. 3. 16.

2015. 3. 16



더딘 문장 앞에서 자꾸만 몸이 무너져내리는 이유. 무거운 추를 몸에 이고 달리는 사람, 그러나 그 추의 무게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순진하고 절망적인 러너는 가벼운 발놀림만을 믿고 호기롭게 달려나가지만 어딘가에 들러 붙어 있는 추 탓에 도무지 무게 중심이 잡히지 않아 이내 고꾸라지고 마는 것이다. 백지 위를 가로질러 달려나간다는 것, 글쓰기가 자신도 모르는 추를 짊어지고 달리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망치듯 달려나가는 가쁜 걸음을 닮은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무너지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한 발 한 발 더디게 걷는 일이 무너지고 고꾸라지는 일을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무너짐과 고꾸라짐도 배움일 수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의 의욕과 사명감 따위로 감춰두었던 거대한 허영을 마주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무너지는 것이 걸음이 된다는 것, 절망의 걸음을 익힌다는 것. 무너져내림으로 쓰는 문장 속에서 너무 일찍 씌어진 글들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글을 쓰는 동안 몸이 자꾸만 고꾸라지는 것은 그간 썼던 글들이 너무 빨리, 너무 일찍 씌어졌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 써야 할 글을 너무 성급하게 써버린 것은 아닌가, 바닥에 엎드려 생각해보게 된다. 씌어진 모든 글이 글쓴이에게 무거운 추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지만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한 상태에서 써버린 문장들을 짊어져야 할 때 그것은 장애물이 된다. 글이란 결국 책임의 목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해본다면 자꾸만 고꾸라지는 몸과 문장이란 너무 빨리 씌어진 글들이 뒤늦게 알리는 거의 유일한 진실의 증표인이기도 할 것이다. 넘어지고 다시 넘어지면서 너무 일찍 씌어진 글은 이미 썼던 글이 아닌 지금 쓰고 있는 글임을, 언젠가는 써야 할 미래의 글임을, 다름 아닌 글쓰기 그 자체임을 슬프게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