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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영혼에 이르는 길

by 종업원 2015. 3. 28.

2015. 3. 28




좋은 글에 이끌렸던 시간이 짧았던 것,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살이) 사이의 낙차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전에 글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바로 그 글을 쓰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쓰는 글과 나(삶) 사이의 낙차를 들여다보면서 글을 맹신하는 것이 무척 위험한 일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말에 이끌리게 되었던 것은 사람의 말에는 사람살이(생활)가 묻어 있었고 온기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음성'과 '표정', '몸짓'이 말을 타고 내게 전해질 때 그간 볼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던 세계가 '물질성'을 띄고 나타나는 듯 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말을 타고 나타날 수도 있음을, 그런 희망을 품었다. 사람의 말이란 어쩌면 뜻이 있는 소식을 전하는 복음(福音)일 수도 있음을 예감했다. 


곡진하게 주고 받은 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세상을 열고 그곳에 이를 수 있는 '없던 길'을 만들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말에 열중하고, 말을 탐닉하고, 말에 상처 받고, 말을 믿었으며, 말을 통해 여기 저기를 옮겨다니고, 말에 기대고, 말과 함께 걷고, 말 속에 머물렀다. 그렇게 말을 주고 받다보면 말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말이 필요 없는 관계'를 일러 (세속적) '연인'이라 한다면 말(만으)로 이어진 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속적 이치를 비켜가는 사잇길을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말에 몰두하는 것이 '로고스(logos/말씀)'에 대한 맹신으로 기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말을 주고 받는 시간 속에서 쌓아올려지는 '관계의 물질성'이 견고해질수록 말로써 (거의) 모든 것을 담아 낼 수 있다는, 말로써 (거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다는, 말로써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맹신이 자리하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말의 탐닉. 그것은 결국 '나'라는 자아/이성/로고스의 탐닉과 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말의 함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없던 세계에 이르게 하는 그 힘찬 말(言/馬)이 상대의 영혼 가까이에 이르게 될 때 영혼을 침해할 수도 있음을, 마침내 영혼을 거덜낼 수도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무섭기만 하다. 곡진하게 주고 받는 말로써 서로의 영혼에 이를 수도 있다는 희망이 서로의 영혼을 거덜 낼 수도 있다는 위험과 등을 맞대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말이 잘 통하는 사이'라는 감정이 더디게 그러나 분명하게 깃들게 될 때, 오직 말만으로 없던 길을 뚫어냈을 때, 더 많은 말을 하고 싶고 또 해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칠 때, 단 하나의 진실만이 오롯하다. 말의 맹신을 통해 가닿아야 하는 곳이 '말할 수 없음'의 영역이라는 것. 말로써 사귄 관계 속에서 소중히 여겨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다름 아닌 '말할 수 없음'의 영역과 그 목록임을 알게 된다. 서로의 영혼에 이르는 길은 뚫어내어 기어이 닿는 걸음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의 영역에 들어서는 걸음 속에서만 잠깐 허락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수 없음과 가닿을 수 없음을 서로에게 겸허히 드러내는 말의 걸음이, '말할 수 없음'의 영역이라는 그 사잇길에 서서 서로를 존중할 때, 나는 '영혼의 울타리'가 우리를 감싸게 될 것임을 예감하게 된다. 그렇게 말에 관한 겨우 다른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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