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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절망하기(1)

by 종업원 2015. 4. 10.

2015. 4. 10




꽃 진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텅 빈 방에 오롯하다. 어째서 ‘절망’인 것일까. 이 생생한 오롯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숨죽이고 생각하다 처연히 고요해진다. 절망한다는 것. 바라던 것(望)을 버려야만 하는 일(絶),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희망을 단념하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그런데 절망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라던 것을 단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절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환기하면서 나는 눈을 뜨자마자 대면해야만 했던 이 생경한 감정을 한켠으로 밀쳐낼 수도, 애써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곧장 물어야만 했다. 절망이 ‘의지’일 수 있을까. 절망이 ‘능력’일 수 있을까. 감히 그렇게 이야기해도 좋을까. 다시 거듭 묻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절망할 수 있는가. 이 자문은 이렇게 고쳐 쓰일 수 있다. 내가 나라는 자아를 단념하고 끊어낼 수 있는가. 나 아닌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일들을 수락하고 감내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찢기우면서 배울 수 있는가. 


성실하게 땅을 일구어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일, 나무를 가꾸어 열매를 수확하는 일, 그것이 아니라면 먼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올리는 일이야말로 삶의 정직한 이치라 믿어 왔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 노력한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 그런 말들이 오직 내 삶 속에서만 침몰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더 이상 그런 이치들을 보살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마흔에 다가서는 생애사적 주기 속에서 ‘희망’이 아닌 ‘절망’을 앞머리에 놓아 두는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농부의 삶도, 어부의 삶도 불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을 인지하면서 나는 ‘사냥꾼’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이곳에 있을 수도 없고 저곳에 있을 수도 없는 이, 산과 들을, 계절과 계절을, 사람과 짐승 사이를 넘나다녀야 하는 이. 무엇보다 한없이 고요하게 숨죽이고, 더할 나위 없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겨냥하고 조준하기를 멈춰서는 안 되는 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모든 것을 다시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사냥꾼이라는 삶의 알짬은 무엇보다 조준하기일 터. 능숙한 사냥꾼들은 짐승의 이동 경로를 미리 예측하여 그 길목에서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예측이라는 것 또한 온전히 예측하는 것이 불가한 짐승이라는 타자에게 내맡겨져 있다. 조준하기 속에 우연이라는 타자성이 깃들 때 격발의 짧은 순간의 기회가 주어질 뿐이다.  말하자면 오직 격발하지 않을 때에 사냥꾼은 사냥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수확물이 없을 때라야 예의 그 기민함과 고요함을 고도로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삶의 앞머리에 놓여야 하는 것 또한 희망이 아닌 절망이어야 하리라.  


절망한다는 것은, 희망하기를 단념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직전까지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의 절망만이 어제의 희망을 증명한다. 오늘도 절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기꺼이 그렇다고 답한다는 것은 내일의 절망 또한 수락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응답은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절망이냐, 희망이냐라는 잘못된 물음이 아니라 절망하기를 단념하지 않음으로써 희망하기의 의지를 지키는 일이다. 절망하기로서의 희망하기. 의욕과 의지에 관한 이 생경한 사잇길이 돌연 도착한 계시나 전향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겠다. 고쳐 말하자면 내 의지를 자만하지 않는 일이자, 내 힘으로 일구고 있다는 믿음의 허위성을 매순간 인지하는 것이 무기력과 우울로 곤두박질 하는 것을 멈춰세우는 일일 것이며 동시에 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른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태도를 고도로 유지하는 일의 지난함을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당기되 쏘지 않는 일'(김영민). 그러니 나는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절망하겠다. 너를 만나자마자 절망할 수도 있음을 수락하겠다. 오늘의 절망으로 내일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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