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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백판거사(柏板居士)"-절망하기(2)

by 종업원 2015. 4. 12.

2015. 4. 11



류영모는 잣나무로 만든 널판을 안방 윗목에다 들여놓고 낮에는 방석 삼아 그 위에 앉아 있고 밤에는 침대 삼아 그 위에서 잤다. 사람들이 류영모의 집에 찾아가 널판 위에 꿇어앉아 있는 류영모의 모습을 보고는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 칠성판 위에 있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안방에 널판을 들여다놓고 그 위에서 40년 동안이나 산 이는 일류 역사에 류영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류영모가 앉고 누운 잣나무 널판은 상가(喪家)에서 쓰는 널감이었다. (중략) 류영모가 쓴 잣나무 널판의 두께를 재어보니 3치(약 9센티미터)이고, 폭은 3자(약 90센티미터), 길이는 7자(약 210센티미터)였다. 

류영모가 널판 위에 사는 전무후무한 기행을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는 동안 등뼈를 고르게 펴려는 건강상의 이유이고, 둘째는 널판 위에서 삶으로써 죽음과 친하려는 신앙상의 이유였다.

―박영호,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362~363쪽.



짐짓 모른 척 하며 게으른 일식을 6개월 정도 해본 바 있었지만 근래처럼 일정한 시간에 맞춰 규칙적으로 끼니를 챙긴 이력은 없는 듯하다. 식사량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것은 포만감 때문인데, 그 원인이 식사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사 시간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홀로살이에 있어 끼니를 챙기는 것이 다소 번거로운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가능하면 간단하고 빠른 시간에 해치워버리기 일쑤였던 지난 날들과 달리 매일매일 한 두 가지의 요리를 하며 이것저것 생각만 하고 있던 음식들을 하나 둘 천천히 만들어 먹고 있다. 무엇보다 <다석전기>를 한 시간 가량 읽으며 끼니를 챙기고 있는 탓에 식사 시간이 늘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볕과 바람이 좋은 날이라 창을 모두 열어두고 끼니를 야무지게 씹어 삼키며 읽고 있다. 식사 시간이 늘게 되면서 음식물을 먹는 시간과 소화되어 포만감으로 전해지는 시간이 겹치는 듯하다. 포만감이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천천히 먹는 탓에 먹기와 소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이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스레 식사량을 조금씩 줄이게 된다. 덕분에 매일 아침 두 세 장의 음반을 듣게 되어 노래를 부르며 씹고 읽기도 한다. 


전날 친구들과 기분 좋게 통음하였다. 아침에 가까운 시간까지 주거니 받거니 한 터라 몸이 가라앉아 끼니를 챙기고 산보에 나섰다. 때마침 도착한 책이 있어 걸으면서 읽었다. 암남공원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오가는 이는 드물고 있다해도 거의가 노인들이다. 죄다 자가용을 타고 날쌔게 지나친다. 그러니 걸으며 읽는다고 해도 중뿔나게 보이지 않을 거 같아 편히 걸으며 읽었다. 그렇게 걷기를 한 시간, 두도(枓島) 전망대에 도착하여 벤치에 정좌하고 책을 읽었다. 호흡을 깊게 하고 한 자 한 자 읽다보니 몸 이곳 저곳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허리를 곧추 세워 척추를 바르게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으며 한 시간 가량 책을 읽다보니 쑤시고 결리던 부분이 천천히 잦아드는 듯 했다. 어깨에 힘을 빼야한다, 상체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 불필요한 긴장에 몸이 경직되어 있다. 읽기를 멈추지 않고 쑤시고 결리는 곳을 천천히 찾아들어가며 내 몸에 대해 느낀 점들이다. 복식호흡을 습관화 하여 단전에 힘을 모으는 호흡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들떠 있어 쉬 피로해지는 몸의 중심을 단전 아래까지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숨이 들고 나는 내 몸에 대해 알 수 있다. 내 몸에 대해 내가 알고 있어야 그 몸으로 쓰는 글을 알 수 있다. 매일 매일 새롭게 알아야 할 일이다. '안다는 것'이 허약하고 얕은 것임을 매일 매일 스스로 깨칠 수 있는 단단한 몸을 가질 때 그 몸으로 맺는 관계와 그 몸으로 쓰는 글 또한 겨우 다져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좋은 상태란 없다. 바로 이 상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불가항력의 힘에 노출되어 있는 이 상태가 내 상태임을 수락하게 된다. 예측불가능한 이 상태 속에서 나조차 모르는 '나'가 있어왔음을, 또 언젠가 도착할 것임을 예감하게 된다. '너'를 그리워하지 않겠다. '너'를 미워하지 않겠다. '너'를 모르겠다. 우연의 힘에 이끌려 다시 마주하게 될 때 네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 하고 지나치겠다. 그럴 수 있으려면, 모르기 위해선 매일 매일 깨쳐야 한다. 매일 매일 부서져야 한다. 매일 매일 절망해야 한다. 꽃 피고 꽃 지는 시절, 붙들어 둘 수 있는 것도 서둘러 보내야 하는 것도 없이 다만, 볕이 깊다. 내남없이 맑고 드물게 곱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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