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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오늘 각자의 윤리-절망하기(4)

by 종업원 2015. 4. 17.

2015. 4. 16

 

 

2015년, 다시 돌아온 4월16일.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잠깐 머금는 기일(忌日). 금식(禁食)하다. 음악을 듣지 않고, 소리내어 웃지 않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상복을 갖춰 입고 종일 벗지 않았다. 유별난 일도, 유의미한 일도 아님을 알면서 무용한 애도를 했다. 홀로 무용함의 목록을 늘려가는 일, 아니 채워가는 일에 집중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애도가 '하기’(행위)가 아니라 '하지 않기’(금지)의 방법에 기대고 있음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기. 그런 것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네 시간 수업을 했고 조금 읽고 겨우 메모 했다. 글쓰기 또한 '하지 않음으로써의 하기'임을 선명하게 알게 된다. 무용함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일들의 목록으로 둘러쳐진 삶의 아득함. 글을 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용함의 일관성 속에서 어떤 쓸모를 애써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별난 일도, 빛나는 일도, 오롯한 일도 아니다. 다만 겨우, 하는 일이다. 그 무능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하지 못함'이 아닌 '하지 않음'이라는 의지가 '어떤 하기'에 겨우 닿을 수 있음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루동안 하지 않기의 목록을 채우는 무용한 행위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누구에게 알릴 일도 없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며 함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지켜보는 이 하나 없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 적요(寂寥) 속에서 겨우 알게 된다. 이것이 내 윤리의 얼굴임을. 불가항력적인 사태를 수락할 때만 잠깐 드러나는 윤리의 얼굴(face)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우리' 힘으로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밀쳐내거나 외면하지 않고 다만 수락할 때, '오늘의 윤리'가 영사(映寫)된다. 그렇게 영사된 윤리의 얼굴이 오늘의 좌표이자 내일로 향하는 이정표다. '하기'가 아닌 '하지 않기'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표면(face)이 있다. 희망이 아닌 절망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2008)이라는 옴니버스 영화 속에 맺혀 있던 33개의 영화관을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영화관에 대한 추억과 낭만, 영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화(관)의 몰락 속에서 그들 각자가 품어 왔던 영화(관)를 애도하는 작업에 가깝다. 33명의 감독들이 그들 각자의 애도 작업을 스크린에 투영할 때 저마다의 내밀한 기억이 영사되는 극장은 애도의 공간이 된다.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저마다의 애도가 바닷물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를 구조할 순 없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수면에 오늘 우리의 윤리를 상영한다. 진도 앞바다는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는 암흑이 아니라 오늘을 상영하는 스크린이다. 오늘 각자의 윤리가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의 표면을 죽음으로 봉인된 관(棺)이 아닌 두드려 깨워 문(門)으로 바꾸는 일을 한다. '인양(引揚) 한다는 것'은 각자의 팽목항에서, 각자의 진도 앞바다에서 관뚜껑 두드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으로 기우는 팽목항 앞에서,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는 진도 앞바다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등불을 키고 불침번을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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