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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다행(多幸)-절망하기(5)

by 종업원 2015. 4. 22.

2015. 4. 21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정전되어 있었다. 밥통을 열고 밥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걸보니 전원이 내려간지 3-4시간은 지난 듯하다. 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심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어 불이 붙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을 쬐어 초를 녹였다. 심지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를 찾을 수 없는 초, 어쩌면 심지가 뽑혀 있던 초. 냉장고에 넣어둔 식재료들이 상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속상했다. 공사 인부들이 오전부터 건물 외벽을 청소하느라 종일 물을 뿌려대던데, 아마도 그 여파로 누전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하니 더 속상했다. 어둠 속에서 잠시 발을 굴렸다. 여기 저기 수소문 한 뒤 '정전 시 대처 방법'에 따라 콘센트를 뽑고 하나 하나 확인하며 다시 켜보았다. 문제는 1층 어딘가에 있었다. 2층엔 전기가 들어온다. 


누전차단기가 내려간다는 것, 다시 올려도 곧 내려간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차단되어 멈춰선다는 것은, 암흑 속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인 것이다. 꺾여 부러진다는 것은, 무릎꿇고 주저 앉는다는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는 것이며, 걸을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이기에 다행한 일이다. 다행多幸이라는 말은 누전차단기처럼 작동한다. 절망 속에서만 조우할 수 있는 다행의 세계. 거듭 거듭 다행할 것, 망설이지 않고 다-행할 것, 그렇게 절망할 것. 오늘 밤, 암흑이어서 다행이다. 뒤엉키고 엇갈려 스파크가 일기 직전에 차단되어 다행이다. 차갑게 식어가는 밥과 상해가는 식재료가 함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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