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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꼭지와 뿌리(1)

by 종업원 2015. 5. 27.

2015. 5. 27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음을 알게 된다. 꼭지와 뿌리 제거 하기. 홀로 끼니를 채우는(해결이 아니다) 시간이 늘어가면서 자연스레 ‘먹고 있는 것’과 ‘먹어야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얼핏 게으르고 무심해보이는 ‘주중 채식’이란 말을 접했을 때 마음이 동했고 식재료를 늘려가기보단 줄여가기의 방식으로 끼니를 다른 방식으로 채워보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지 각종 ‘볶음’에 의지하고 있지만 빼놓지 않는 샐러드가 ‘무침’의 일종일 수 있다면 부족하나마 내 끼니에도 다른 궤적이 생기고 있는 중이라 말해볼 수도 있겠다. 


야채와 과일을 손질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새삼 그것들 중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리는지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 잦다. 꼭지는 필연적으로 제거하고 뿌리 식물이 아닌 한 그것 또한 손질 되어야 함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꼭지와 뿌리는 ‘생명’의 중요한 통로며 결정적인 매개다. 생선(회)이나 육고기에 대가리가 빠져 있는 것처럼 꼭지와 뿌리를 제거하는 이 일관된 ‘의식’이야말로 ‘식재료’를 만들어온 오랜 음식 문화의 공정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말하자면 버섯이 식탁에 올라오기 위해선 뿌리를 잘라 내야 하며 고추나 과일 또한 꼭지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느새 음식 쓰레기로 분류되어 있는 꼭지와 뿌리를 만져본다. 맛이 없는 것, 단단히 여문 것들. 아니 단단히 여물어야 했기에 맛을 가질 수 없었던 것들. 단단한 것이란 단단해져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단해져야만 생명을 지키고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단하다는 이유로, 맛을 챙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거되거나 버려진다. 끼니를 채우는 생활 속에서 꼭지와 뿌리를 인지한다는 것은 더 많이 먹어치우는 것이 미덕인 한국의 왜곡된 식문화를 성찰하는 일과 겹쳐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더 먹(갖)지 못하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은 비단 게걸스러움을 정상으로 인지하고 있는 식문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것을 ‘뷔페 사회’라고 이름 붙여본 바 있는데, 야채와 과일의 꼭지와 뿌리에 대해 생각하며 끼니를 채워가는 일이 다른 사회를 상상해보는 일과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잠깐 머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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