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4
잠깐, 하는 사이에 놓쳐버렸다. 놓친 것을 다시 잡기 위해 뒤쫓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붙들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애씀에 기댈 때 일상이 겨우 지켜진다. 까치발을 세워 잠시 넘어다보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니 일상은 놓치는 것 투성이이자 너머를 볼 수 없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깜빡하고 잠들어버렸을지라도 이내 깨어나는 것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라면 실수로 공을 놓쳤더라도 다음 번엔 당연히 그 공을 잡을 수 있다 믿어야 한다. 생활인(生活人)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숱한 한계와 실수를 마주하는 일이 바로 '생활'이다.
생활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성과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계와 실수'를 제대로 마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잠깐과 잠시를 인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생활의 거의 유일한 열매인 '겨우'를 어렵게 힘들여라는 '애씀의 부사'가 아니라 '고작'이라는 '한계의 부사'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밥을 짓고 야채를 다듬을 때도 까치발을 세워야 하는 순간이 있다. 늘 만나는 가까운 이와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도 애를 써서 듣고 말해야 한다. 그 애씀이 귀찮거나 하찮아질 때 일상이 무너진다. 사소한 일을 두고 중뿔나게 비장한 척 하라는 게 아니다. 생활은 말 그대로 '살아 감의 운동'이니 한 순간도 사소할 수가 없다. 내 마음대로 될 때(私消) 생활은 곧장 사소(些少)한 것이 되곤 하지 않는가.
거실에 서서 해변가를 바라본다. 하염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행락객들이 구분 없이 어울려 평화로운 풍경처럼 보인다. 생활은 풍경이 아니다. 두 발 붙이고 서서 구경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쉼 없이 움직이며 쫓아야 한다. 그래서 실상보다 더 커 보이기도 하고 바로 눈앞에 두고도 어이 없이 놓치는 것도 많다. 생활에 집중하다보면 '생활 밖에 남지 않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성실하게 생활을 돌보고 있음에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상태, 생활의 함정. 이 또한 깜빡 잠이든 것처럼, 잠깐의 실수처럼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당연히 빠져나올 수 있고 또 만날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뒤늦게 발견하고 다시 고쳐 적는 것처럼 찾아서 바로 잡으면 될 일이다. 제가 한 일(쓴 글)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스스로에게 빠져 있으면 결코 다시 알아차릴 수 없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생활, 생각날 때 잠깐 충실하게 되는 생활. 그것은 생활이 아니라 변덕일 뿐이다. 자아의 들썩임에 기대어 있는 일상만큼 위태롭고 가난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토록 불안정한 생활을 나침반 삼아 걸어갈 수 있는가, 계기판 삼아 조정해갈 수 있는가. 내가 생활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생활은 항상 나보다 앞서 있다. 애써야 겨우 그곳에 닿을 수 있다. 애써야 닿되 겨우 닿는다. 그러니 닿는다 해도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겨우 닿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생활의 신비다. 있어도 그만인 듯, 없어도 그만인 듯한 '부사'(副詞)야말로 생활을 닮[닿]아 있다. 무용한 부사 하나를 겨우 쓰는 일, 그것은 “그 스스로를 오히려 숨기는 편이면서도 기꺼이 이웃을 도와 그 전체의 행로를 바꾸는 변침(變針)의 노동을 하는 번득임”(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이기도 하다. 생활을 보살피고 지켜가는 일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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