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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이별례離別禮 (2)

by 종업원 2015. 6. 1.

2015. 6. 1


 

“1972년 9월 18일에 이현필이 창설한 금욕 수도 집단인 동광원 벽제 분원에 필자가 스승 류영모를 모시고 원생들의 수련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다. 류영모가 강사로 초청되었다. 류영모는 밤 10시부터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새벽 3시에 일어났다. 필자도 따라 일어났다. 함께 맨손 체조를 하고는 손바닥으로 몸의 살갗을 문질렀다. 냉수 마찰 대신에 살갗을 문질러 피돌리기를 하는 것이다. 다 마치고 방을 거닐던 스승이 털석 주저앉았다. 이 사람은 스승이 뇌빈혈을 일으켜 쓰러지는 줄 알았다. 퍽 쓰러지듯이 주저앉으면서 하는 말이 “그도 지금쯤은 일어났을 터인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생전에 돌아오려는지.” 류영모가 ‘그’라고 한 이는 물을 것도 없이 제자 함석헌을 가리킨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함석헌을 생각한 것이다.”

―박영호, 『다석 전기 : 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596~597쪽.

 


‘마음을 허락한 사이’란 비단 사제지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류영모는 “내 뒤에 오는 자가 나보다 앞선 자”라 말하며 그의 제자 함석헌을 제 몸처럼 여겼다고 한다. 여색(女色)에 관한 추문을 듣고 그를 타일렀으나 함석헌은 스승의 말을 수락하지 못하고 다만 ‘스승님 몰래 톨스토이가 아닌 괴테를 읽어왔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와 결별하고서도 류영모는 제 몸처럼 아꼈던 함석헌 생각을 멈추지 않은 듯하다. 결별 이후 ‘벗이여, 아주 갔는가’라는 물음을 품고 살았던 것이다. 류영모의 또 다른 제자, 그의 정신을 글로써 새기고 있는 이, 박영호가 기록하고 있는 위의 대목은 그 물음을 말하거나 전하지 못하고 다만 품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전할 수 없는 염려를 품고 무너지는 일. 꼭 사제 관계가 아니더라도 재앙과 같은 관계의 비용을 치루어야 하는 일을 드물게라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세속의 이치겠다. 연인, 가족, 친구, 선후배들, 내 몸처럼 아꼈던 이들과의 결별이 남긴 상흔들. 쓰러지듯이 주저앉는 염려를 품고 살아갈 수 있는가, 증오와 원망으로 검게 칠해 지워버리지 않고 응답 받을 수 없는 안부를 물으면서 안심의 텃밭을 일구어갈 수 있는가. 저 대목을 읽었던 아침,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오직 이 막연한 옮겨적음을 통해서만 그런 삶의 희망을 잠시 품을 수 있을 테지만 그 한계를 뻔히 알고 있다 해도, 오랫만에 전하는 안부 인사처럼 누군가의 안심을 기원하며 편지로 적어보내기도 했다.


이별이 세속 관계의 알짬임을 깨단했던 아침. 나는 결별과 이별의 차이를 어림짐작하고 또 열심을 다해 헤아려보았으나 죽음이 삶의 조건인 것처럼 관계의 조건 또한 이별임을, 속절없이 헤어져야만 한다는 그 단단한 이치 앞에서 둘은 구별해야 할 것이 아니라 수락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모든 이별은 황망하고 몸서리쳐지는 일이지만  힘겨운 수락의 일말고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이 많지 않겠는가. 이별에 예(禮)를 다하는 일.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매일 아침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일은 떠나가신 분을 기리기 위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지금 없는 이 앞에 매일 아침 고개 숙이는 일이란 죽음 앞에 무릎꿇을 때만 마주할 수 있는 진실과의 대면을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끝'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자아 밖에 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를 삶의 시간으로 삼는 일. 모든 만남이란 실로 재회(再會)와 다르지 않다. 오늘의 만남은 어제의 이별을 어떻게 겪어내었으며 또 겪어내고 있는가를 거듭 비춘다. 그러니 진실은 이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만남 속에서도 우리는 진실의 순간과 대면하게 된다. 매일 매일 이별례를 치루는 일이 매일 매일의 만남에 충실할 수 있는 일임을 알게 된다. 눈 뜨자마자 "털썩 주저 앉"는 일, 무너져야만 보이는 것과의 대면을 피하지 않는 일. 일어난다는 것,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주저앉음과 무너짐이라는 그 영도(零度)의 상태를 시작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별을 영도의 시간으로 삼는 일. 매일 매일 이별례를 치루는 일. 그래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래야만 오늘도 만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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