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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주중 채식’ : 환대의 맛

by 종업원 2015. 6. 17.

2015. 6. 16



부지런’이라는 강박은 학습된 권면을 따르고자 애썼기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벗어날 수 없는 '자아 회로'나 '증상'과 같은 것인데, 대학 시절부터 나는 늦잠 자는 것을 멀리 했고 군대 시절 선임병이 되어서도 허용되지 않은 늦잠이나 낮잠을 한번도 자지 않(못)았다. 그렇게 부지런을 떠는 일이 남들과 다른 탁월한 생산성으로 연결되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부지런 했던 것이다! 한 때는 맛있는 것에 대한 욕구도, 잠에 대한 욕구도 없는 내가 한심하고 원망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부지런. 내 청춘을 작은 단어 하나에만 담아야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부지런'인지도 모르겠다. 부지런한 청춘이라니! 나는 쉬는 법을 몰랐고 노는 법도 몰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떤 일을 하고 난 뒤에도 '성취감'이랄 것이 크지 않았다. 남들은 원고 마감을 하고 나면 친구들을 불러 거나하게 술을 마시며 피로를 푼다고도 하고 '내게 주는 선물' 따위처럼 스스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도 곧잘 하건만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술 한잔 하자고 연락한 일도 드물거니와 불러낸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나 스스로에게는 또 얼마나 철저하고 궁색하게 구는지! 이 부지런의 증상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은 나 하나만은 아닐 게다. 내 오랜 친구가 한 때 쉬지 않는 나를 일러 '쏠져'라고 불렀는데, 그런 나로 인해 함께 작업을 하고 있던 그곳이 '군대'처럼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쏠져'라는 호명에 환한 웃음으로 화답한 게 새삼 미안해진다. 

 


오랜 증상도 잘 다독이고 보살피면 썩 괜찮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홀로 밥을 지어먹는 일에 열심을 부리던 차 얼마 전부터 '주중 채식'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수행해보고 있다. '비건(vegan)'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미각을 만족시키는 것에 대한 욕구가 크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힘들이지 않고 육식을 줄일 수 있는 이이지 않을까. 모임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매식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야채로만 식단을 채워가고 끼니를 이어간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물론 나는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지금 당장 육식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중 채식'이라는 말은 그 일을 '부지런'이 아닌 '여유' 속에서 수행할 수 있게 했던 탓에 차라리 전에 없던 '자유의 허용'으로 다가 왔던 것이다.  물론 '채식'이라는 것이 '절대 선'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건 '내 결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변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며 또 도와야만 지속할 수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려면 '채식'에 대한 자기 인식이 분명해야 할 것이다. 내가 '주중 채식'이라는 것을 결심한 것은 소박한 이유에서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고 또 먹었는지 나 스스로가 아는 것.' 우리가 육류를 많이 먹는 것은 그것을 좋아해서라기보단 우리 앞에 육류가 ‘있기’ 때문이다. 좋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있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더 먹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더 먹지 못해 아쉬워 '맛집 지도'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지역이라는 삶 터가 특정한 먹거리로 요약/축약된다. 셰프들은 손발을 걷어올려 레시피를 나열하고 뽐내며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는 요리 묘기를 부린다. 더 먹지 못한 아쉬움을 이용한 '먹방'과 '쿡방'이 공중파와 케이블을 몽땅 장악했다. 그런 세상에서 더 먹지 않는 것, 먹고 싶은 것과 먹지 않아도 될 것을 분별하는 것, 지금의 '먹기'가 이 세계에, 또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잠깐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내가 '주중 채식'을 이어가고 있는 작은 이유이다. 

 

 

무엇보다 '주중 채식'은 여유와 즐거움이 없던 나를 배려하는 일이기도 하다. 매일 이런 저런 요리를 하고 그것을 남김없이 맛있게 먹는 일은 경험해보지 못한 실로 큰 즐거움이다. 다진 마늘에 의존적이긴 하지만 간장과 식초의 독보적인 맛, 조금만 뿌려도 식재료의 질감이 완전히 달라지는 소금의 신비, 볼 때마다 경이로운 붉음을 발산하는 고춧가루의 빛깔, 장기간 ‘음복’하고 있는 매실원액 등 양념류 뿐만 아니라 다종한 버섯들의 각기 다른 질감과 향, 감자와 호박의 풍족한 부드러움, 놀라운 가성비를 자랑하는 양배추와 가지의 발견! 그리고 두부의 희멀건 무궁무진함! 급기야 무언가를 심고 싶다, 길러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슬쩍 품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발견하는 재미보다 더 강렬한 것은 외려 어떤 것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한끼도 빼놓지 않고 먹었던 어묵을 더 이상 찾지 않고 라면 또한 언제 먹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마치 비상 식량처럼 늘 챙겨두었던 계란도 사지 않은지 오래고 가공육 또한 집에서는 먹지 않는다[우리가 육식을 먹는 이유는 값싸고 흔한 '정크 푸드'가 대개 가공육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무의식적인 육식과 의식적인 채식의 심급은 신념보다 계급이 우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될 때 가까웠지만 알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만나게 되는 기쁨과 즐거움이 도착한다. 그것이 미련하기만 했던 오래된 ‘부지런’이 내게 전하는 뒤늦은 우정의 선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기억할만한 기쁨을 기록해두고 싶다.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었고 뒷자리엔 틀림없는 육류들로 가득 했다. 나는 왠일인지 ‘그 치킨들’이 먹고 싶지 않았다. 채식이라는 원칙 때문이 아니라 그저 먹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말 없이 먹지 않았다. 그러나 ‘치맥’은 진리이지 않은가. 그것은 맛을 떠나 강렬한 (식)습관이다. 한국에서 '치맥'은 차라리 명령에 가깝다고 해도 좋다. 팝콘을 주어 먹던 내게 옆자리에 있던 이가 호의로 자꾸만 치킨을 권했다. 나는 웃으며 팝콘을 치킨처럼 뜯어 먹는 것으로 대신했고 숙소에 입실하기 위해 일찍 일어선 나를 따라 한 친구가 동행해주었다. 서울에 오면 늘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곤란을 겪었는데 사귐이 깊지 않은 한 친구가 기꺼이 함께 묵어주겠다면 문래동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해두었다는 것이다. 숙소는 무척이나 ‘험블’했지만 제 집을 내어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흔쾌히 동행해준 그 친구의 마음씀이 고마웠다. 숙소 앞 편의점 벤치에 앉아 추적추적 내리를 빗줄기를 피하며 캔맥주를 나누어 마시는데 그 친구가 진공 포장된 소세지를 사와 내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전자렌지에 돌린 후라 소세지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나는 그 소세지를 베어물었다. '틀림없이' 맛있다. 소세지는 맛있었다. 그 친구가 건네준 뭉툭하지만 김이 나는 단순한 모양의 소세지를 나는 영화 <황해>의 하정우가 빙의한 마냥 와구와구 맛있게 먹었다. 아무리 주중 채식을 하고 있다고 해도 6월의 먹거리는 아마도 그 소세지로 기억될 듯하다. 그것은 참다가 맛 본 가공육의 달큰한 해방의 맛이 아니라 드물게 허락되는 '환대의 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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