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글쓰기

<생활-글-쓰기 모임> 2회

by 종업원 2015. 7. 10.

2015. 7. 7

 

 

 

design by yang

 

 

생활-외국어-번역 하기

 

 

1

작년 7월, 동료들과 팀을 이루어 독일 베를린에서 한 달 간 체류하며 공동 작업을 했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이었지만 설렘의 시간은 잠깐이었고 서른이 훌쩍 넘은 이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이국땅에서 공동 작업을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일 낯선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우리 모두는 급속도로 지쳐갔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황판단능력과 직관능력이 간난 아이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몸으로 체험했던 힘든 시간 속에서 적어도 서로에게만큼은 싫은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홀로 애썼던 시간을 기억한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았기에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끝내 말하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 육식동물에게 쫓기는 초식동물처럼 도망치듯 돌아온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쉼터로 숨어버렸고 그 모임은 해체의 선언조차 없이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예술가들의 도시라 불리는 베를린을 나는 공원의 도시로 기억한다. 공원을 위해 이 도시가 존재하는 거라 여겨질 정도로 어디를 가더라도 공원이 있었고 자리를 펴고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무리들 사이엔 몸의 밀어를 탐닉하는 연인들이 있었다. 종일 간난 아기가 될 수밖에 없던 시간을 견디고 숙소로 돌아오던 늦은 밤, 슬쩍 돌아본 곳에도 여전히 공원이 있었다. 초록 위에 초록을 계속해서 덧칠하면 저런 깊고 짙은 어둠의 색이 나올까. 밤 공원 입구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우람한 나무들로 울창하면서도 한없이 자유롭고 넉넉한 평지에 은총처럼 쏟아지던 투명한 햇살. 그 공원들이 단 한번도 누군가로부터 침략 당하지 않고 고고하게 제 삶터를 지키며 성숙해온 유럽 역사의 당당한 표정인 것만 같아 마냥 이끌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2

돌이켜 생각해보니 검게 울창했던 밤 공원의 입구에서 망설였던 기억은 어쩌면 그곳에서 함께 생활 했던 동료들 앞에서의 망설임이 변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일 간난 아기처럼 아장거려야 했던 걸음의 안쓰러움은 베를린의 거리가 아닌 너와 나 사이의 거리에서 극대화 되었던 것일 테다. 망설임의 종종 걸음이 쌓이고 쌓여 코앞까지 왔다가 돌아간 발자국들로 검게 칠해졌는지도 모른다. 한발짝만 더 다가서면 네(내)게 이르는 문을 열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네(내)가 문을 열어주었다면 망설이다 돌아가던 발걸음을 다시 돌릴 수 있었을까. 차라리 망설이다 끝내 말없이 돌아서야만 했던 그 검은 발자국의 글자를 더듬어 읽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더듬어야 하는 기억은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이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내뱉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줄곧 주고받았던 말 속에 차마 하지 못한 말이 감춰져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이 어디 먼 이국의 땅에서만 그런 것이겠는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 속엔 끝내 하지 못한 말이 숨겨져 있다. 무언가를 말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하고 또 말한다. 무언가를 쓰지 않기 위해 한사코 쓰고 또 쓴다.

 

침묵은 그저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이 영영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인 것만도 아니다. 반복해서 썼던 한 마디의 말이 흰 종이 위를 검게 채워버린 것, 더해지고 더해져, 쌓이고 쌓여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검은 흔적. 그것이 침묵의 글자다. 글자를 쓰면서 글자를 감추는 일, 어쩌면 그것이 글쓰기인지도 모른다.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한 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쓴다. 그렇게 검게 칠한다. 검은 침묵을 번역하는 일이란 했던 말을 다시 돌이켜보고 썼던 글을 다시 읽는 것이다. 문제는 쓰면 쓸수록 정작 하고 싶었던 말과 쓰고 싶었던 글을 점점 더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쓰는 것은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쓰는 것만으로는 영영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장소가 있다. 읽기를 쓰기의 짝패라 불러도 좋을까. 그렇다면 네(내)게 닿지 못했던 그 망설임의 걸음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쓰기 속에 감추어 놓은 말은 어떻게 들어야 할까.

 

 

3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에 홀로 나섰던 긴 산책을 기억한다. 우산을 쓰고 손전등도 없이 산으로 향했던 밤, 달도 없고 불빛도 없던 야트막하게 숨가빴던 ‘암남공원(岩南公園)’의 미로 갔던 길.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그 길을 망설이며, 더듬으며 두 시간정도를 내처 걸었다. 분명히 몇 번 걸어보았던 길이건만 이토록 낯설고 생소하다니! 두려움은 어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던 것을 더 이상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두려움에 감금된다. 그러니 어둠에 집중해서는 두려움으로부터 나갈 수 없다. 어둠은 걷혀 지는 것이 아니라 더듬으며 걸어 나가야 하는 길(조건)일 뿐이다. 어둠 속을 더듬으며 걸어갈 수 있는 힘 또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번 걸었던 길이라는 기억이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갈 수 있는 동력이다. 확신할 수 없는 걸음을 한발짝 떼어 옮길 때 작은 불빛이 잠깐 켜졌다가 꺼진다. 꺼진 자리에서 다시 더듬으며 발을 뗄 수 있는가. 글쓰기 또한 등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잠깐 켰다가 끄는 일이다. 걷거나 써도 남는 것은 어둠이며 침묵이다. 그 어둠 속에서 망설이며 다시 걸을 수 있는가, 다시 쓸 수 있는가.

 

생활-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익숙한 일상을 글로 옮겨 적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환한 날, 내가 한번 걸었던 길을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다시 걷는 일처럼 환히 보이는 생활을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매만지는 것 속에 생활-글-쓰기의 요체가 있다. 말하자면 생활-글-쓰기란 알고 있다 믿고 있던 ‘생활’을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생소한 말들로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생활 속에 감추어 둔 것을 보물찾기마냥 뒤늦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생산하고 발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생활을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생소하게 매만질 수 있을 때, 바꿔 말해 외국어처럼 낯설게 여길 수 있을 그간 알지 못했던 생활과 언어가 잠깐 점등 한다. 생활이야말로 깨달음과 성숙의 영토다. 매일 매일 생활을 보살피고 지켜가는 것은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끈기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생소한 것으로 번역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거듭 물어야 한다. 매일 먹는 밥과 배설을 깨달음과 성숙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가. 반복할 수밖에 없는 도리 없는 생활이 아니라 한사코 반복하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의지가 발현되는 장소로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가.

 

내리던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두 시간동안 쉼없이 걸어 ‘암남공원’의 끝자락인 ‘두도 전망대’에 겨우 당도했건만 돌아갈 힘이 남아 있지가 않았다. 어떻게 다시 돌아가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는 일이다. 사력을 다해 걸어온 만큼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지름길이 아니라 왔던 그 길을 되밟아 다시 돌아가는 일. 나는 밤 산책의 알짬이 왔던 길을 되밟아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는 힘겹고도 생소한 그 길에 있음을 직감했다. 어둠 속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되밟고 돌아가는 일은 가파른 길이나 초행길을 가는 것보다 훨씬 힘든 길이다. 생활-글을 쓴다는 것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생활-글-쓰기 모임> 2회 여는 글_ 광복동 <잠>게스트하우스_ 2015년 7월 7일

 

 

 

 

 

 

 

 

'회복하는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심의 영주권  (0) 2015.07.24
<생활-글-쓰기 모임> 3회  (0) 2015.07.22
이별례(4)-기적과 지옥  (0) 2015.07.01
시작을 시작하기  (0) 2015.06.28
<생활-글-쓰기 모임> 1회  (0) 201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