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
모든 만남은 재회(再會)다. 만남이 언제나 두 번째인 것은 헤어짐 없이는 그 어떤 만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 빈껍데기이듯 이별없는 만남은 변덕일 뿐이다. 재회란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라는 낭만적인 인연론에 기대어 있기보다 ‘우리는 언젠가 헤어진 적이 있다’는 서늘한 이별을 조건으로 한다. 다시 만났다는 것은 기적이면서 동시에 지옥이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음에도 끝내 ‘다시’ 만났다는 것은 기적이지만 도리없이 ‘다시’ 만나버린 건 너와 내가 같은 곳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맴돎의 지옥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만남이 떨림을 주된 정서로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기적과 지옥 사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만났으며 (다시) 헤어진다. 후유증 속에서 이 재회를 다시금 들여다 보게 된다. 내게 후유증은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의 유일한 증거이거나 하나의 증상으로, 또한 힘겹게 치루어야 하는 비용의 자리에 있다. 후유증 없는 만남이 가능할까. 가능하며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도리 없다. 도리 없기에 후유증이 없는 만남이야말로 내겐 문제적이며 비정상적이라 생각될 지경이다. 후유증이라는 만남의 비용을 치루어내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공부와 배움을 구하고 이어지는 만남의 씨앗을 품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게 된다. 후유증을 비용으로 수락하고 치루는 일과 그것에 붙들리는 것은 다른 일이다.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로부터 떠날 수 있다. 만남의 후유증을 ‘수락의 동력학’으로 전환하는 것은 온전히 각자의 몫인 셈이다. 바로 그곳에 성숙의 가능성 또한 잠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만남 이후 ‘진이 빠지는 일’은 후유증의 공통된 증상이다. ‘진이 빠지는 일’은 만남에 애를 썼다는 것의 증거이겠지만 그보단 빨리 지쳐버렸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의 애씀이 언제나 만족할만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내 힘(만)으론 이룰 수 없는 것을 깨단하는 것이야말로 애씀의 성과라고 해도 좋다. 관계의 애씀은 외려 어떤 성급함을 되비추기도 한다. ‘진이 빠지는 것’은 성급히 요구하는 기대와 욕심의 증상이지 않은가. 어떤 만남과 모임 이후 진이 빠지는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성급한 기대와 요구에 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진이 빠지는 증상’에 되비추게 되는 더 중요한 물음이 있다. ‘만남 이후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후의 시간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안달하며 이후의 시간을 독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며칠 진이 빠진 상태로 지내며 이 후유증이 되비추는 증상들과 대면하려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바로 그곳이 내가 다시 생활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오솔길이다. 힘겹게 접어든 오솔길이라 늘 생소하지만 그럼에도 익숙하게 더듬다가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모든 글쓰기는 이후의 시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 없이는 씌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글을 쓴다는 것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未-來) 시간을 예비하고 환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향해 문을 여는 일, 아니 없는 길을 밟아 흔적을 남기는 일, 그것도 아니라면 문을 만들어서라도 열어 반기는 일, 그런 문을 만들 수 없다면 사방의 벽을 두드려 문으로 깨우는 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종이 위에 연필로 빠짐없이 칠하며 오래 전부터 지면(地/紙面) 아래에서 버티고 있어온 이들의 무늬를 종이 위에 새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글쓰기는 홀로 쓰는 것도 아니며 처음 쓰는 것도 아니다. 아, (다시) 쓴다는 것은, (다시) 만난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면서 지옥이다.
* <생활-글-쓰기> 모임 1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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