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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안심의 영주권

by 종업원 2015. 7. 24.

2015. 7. 23




임권택 영화를 향한 정성일의 변치 않는 열정적인 애정과 구애를 접하면서 감지했던 사실을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에 대한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의 애도 섞인 헌정 속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대가(大家)를 다루고 있는 수많은 글들 중 읽는 이에게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은 천재적인 위대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일상과 같은 부분에 밑줄을 칠 때라는 것을. 내게 ‘비범’이란 오직 일상과 생활이라는 ‘평범의 토양’에서만 길어올려지는 것이다. 그런 염원을 품고 현장에서 인용했던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대한 하스미 시게이코의 표현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빌린 책을 반납일에 쫓겨 급하게 읽으며 이 구절과 짧은 단상만을 옮겨놓은 터라 도서관에 올라와 반납한 책을 다시 펼쳐 찾아보았지만 온전한 문장을 찾을 수가 없다. 찾기를 포기하고 챕터 제목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나란히 자리 잡는 것>부터 찬찬히 다시 읽어가다 <오즈적인 운동>의 한 대목에서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시 찾은 그 대목을 여기에 옮겨 쓴다. 




   




“아마 요코하마에서 꽤 많은 손님이 내려서 하라 세츠코가 류 치슈의 옆에 앉는 것이 가능했다는 설정이겠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읽을 것에 눈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갑자기 보게되는 우리들은 이것이야말로 오즈에게 알맞은 배치라고 확신하여 안심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린다.”

―하스미 시게이코, 『감독 오즈 야스지로』, 윤용순 옮김, 한나래, 2001, 146쪽.   



기타가마쿠라에서 동경으로 향하는 단조로운 반복의 통근 열차 안의 부녀는 붐비고 있는 탓인지 마주 앉게 된다. 별다른 말을 나누거나 행동 없이 열차는 동경을 향해 달리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미동조차 없는 정적 속에서 ‘오즈적인 운동’을 간취해내는 것이다. 인물들이 마주 앉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는다는 점을 발굴하면서 하스미 시게이코는 “그저 같은 하나의 것을 두 사람의 존재가 동시에 눈에 담는다는 몸짓 그 자체”에서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는 동적인 서정”이 형성되고 있음을 말한다.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는 표현에 강하게 이끌렸던 것은 오즈의 영화 속에 감춰진 수수께끼의 해답이었기 때문도 아니며 하스미 시게이코의 면밀하고 사려깊은 통찰의 시선에 매혹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짧은 장면을 보면서 ‘안심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평범의 세계 속에서 영글어간 비범의 열매가 만개해 불꽃처럼 터지는 찰나와의 조우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심한 반복 속에서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 나는 노트에 적어두었다. 반복의 지겨움이 아니라 그 틀림없는 반복을 확인하면서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 독자(관객)는 작가와 작품 속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게 되는 축복 속에 머물 수 있는 영주권을 가진 이라 말해도 좋다. 안심의 세계에 머물 수 있는 영주권을 발급하는 이는 누구인가. 곁의 동료다. 변함없이 쓰고, 틀림 없이 읽고 있는 이다.  


생활-글-쓰기는 곁의 동료에게 이르고자 열차에 올라타는 일과 유사하다. 어떤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미세한 진동을 분명하게 감지할 때가 있다. 이 글쓰기가 어딘가에, 누군가에 가닿고자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군가가 이 글을 향해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너가 가고 있고(쓰기) 나/너가 오고 있으니(읽기) 내내 진동한다. 달려와 부싯돌을 켜는 것처럼, 불꽃을 피우는 것처럼 잠깐 작열한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던 스위치는 켜는 일이라 믿고 있다. 글쓰기란 그렇게 만나 서로의 등불을 켜는 일이라 믿고 있다.  



 * <생활-글-쓰기 모임> 3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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