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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기

언어를 타고 몸이 간다

by 종업원 2011. 5. 20.

 



 선상 위에 올라온 미끄덩한 ‘그것’은 물밖의 공기가 제 몸을 감싸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온몸을 뒤척이며 뛰어오른다. 물속에서와는 전혀 다른 몸짓으로, 저 자신도 알지 못했던 몸짓으로, 그러나 물속에서 익힌 바로 그 몸짓으로, 자유와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뛰어오른다. 경계선을 뚫어내기 위해 도약을 해보지만 ‘길’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이내 ‘물고기’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새로운 이름을 얻자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선상 위의 도약 또한 ‘싱싱함’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물고기의 숨통이 끊어지면 ‘생선’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물밖에서 길을 내려했지만 그 도약의 힘은 ‘물고기’로, 다시 ‘생선’으로, 다만 지상에 더 가까운 이름으로 변해갈 뿐이다.

 ‘물고기’에서 ‘생선’이 되는 짧은 순간. 선상 위에 올라온 미끄덩한 ‘그것’이 ‘물고기’가 되는 찰나. 그곳에서 나는 ‘시적 순간’을 본다. 기왕의 질서를 반복함으로써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공동체의 규칙 속에 밀어 넣을 때 발생하는 찰나의 에너지는 질서와 규약들을 팽팽하게 잡아 당겨 견고한 현실을 긴장감이 넘치는 장으로, 무엇인가가 출현하거나 발생할 것만 같은 예측불가능한 장으로 변주한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를 캐낸다. <시의 요체는 ‘지속력’이 아니라 ‘움직임’에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무릉도원’에서 살 수 없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 곳에서 언어는 아무런 움직임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려 자족적인 삶이 가능한 그 도원, 바꿔 말해 마음의 ‘고향’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그곳은 비로소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아니 고향이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지반 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으로부터 나올 때 ‘꽃피는 산골’이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다시 선상의 비유를 빌리자면 선상 위의 물고기는 죽음의 문턱 혹은 무한한 자유 앞에서 비로소 몸에 새겨진 고향(물속)의 무늬, 저 조차도 알지 못했던 무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떠나온 고향, 다시 그곳으로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몸은 더 다급해지기 마련이다. 몸이 갈 수 없는 곳을 언어가 간다. 언어를 타고 몸이 간다. 아니 언어가 몸을 끄-을-고(김영민) 나아간다. 시가 물이 아닌 뭍에서 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언 손으로 살리다> 부분, <<실천문학>>102호 2011년 여름호에 기고


 *선상 위에 올라온 미끄덩한 '그것'에 대한 문장은 지난(!) 봄, 유일했던 봄날, 그러나 불행히도 파도가 높았던 그날, 철학자 k선생과 함께 뱃놀이 소풍 중 거대한 우럭을 낚으면서 새겨진 이미지를 변용한 것이다. 우리는 '한배'를 타고 수영만을 배회하고 질주하고 맛봤다. 부산 사람인 듯, 서울 사람인 듯, 육지사람인 듯, 뱃사람인 듯, 소풍을 온 듯, 낚시를 온 듯, 실업자인 듯, 갯지렁이 수십마리를 낚시 바늘에 꿰어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던가, 우리가 낚아올린 것은 무엇이었던가. 저 멀리서 기어코 황사바람이 도착하는 듯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좁은 배위에서 서로가 마주해야만 했던 관계의 미끄덩함은 좀처럼 마르지 않고 내내 미끄덩했다. 바다 한켠에 오륙도가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보트의 속력을 좀 더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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