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던지기

진돗개 하나*

by 종업원 2011. 1. 23.

 

  전쟁은 사랑의 체위(體位)를 변화시킨다. 전시 중엔 여성상위(騎乘位)가 선호된다. 병사들은 대개 부상을 당했거나 피로하고, 병사가 되지 않은/못한 이들은 격렬한 움직임으로 전후방의 고통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엔 대개 후배위(後背位)가 선호된다. 전시 중에 저질렀던 각자의 만행들을 폐허 속에 묻어 두어야만 삶을, 관계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렵다. ‘아버지’가 집을 떠났을 때, 가족 구성원들의 삶은 ‘귀환’이라는 축을 철저하게 망각하는 궤도를 가지고, 집을 떠나 병사(兵/病士)가 되어버린 이 또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만행을 저질러야만 한다. 그러니 이들이 재회하는 순간에 포착되는 ‘놀람’의 표정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귀환에 대한 반가움이 아니라 미처 생각지도 못한 순간과의 대면에 대한 놀라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재회했지만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 다만 상대의 뒷모습을 보며, 그 ‘지워진 얼굴’을 통해 전쟁이라는 ‘부재의 시간’을 애도하고, 복수한다.



 

  전쟁과 체위(體位)가 맺는 이 같은 긴밀한 상호성은 비단 성적 행위 방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체위의 변화란 곧 관계 양식의 변화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몸의 변화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훼손되었던 체제를 더욱 강력한 것으로 대체하고 무너졌던 권위를 복원한다. 전쟁이 끝나도 무기는 남는다. 국경 밖을 향해 있던 그 무기는 국경 안, 삶-공간 또한 겨누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적과 아군의 경계가 분불명함을 의미함과 동시에 전쟁과 일상을 구분지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국가라는 개념의 핵심에 삶의 사법적 측면을 지칭하는 ‘국가’(State)와 개인의 성격에 따른 면을 가리키는 ‘상태’(state)의 긴장이 놓여 있음을 지적한 주디스 버틀러의 언급**을 경유해 국가(the State)와 개인의 삶의 상태(state) 사이의 분리불가능함을 떠올려 본다면 전쟁과 사랑의 체위가 긴밀한 연관 속에 놓여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전쟁은 국경 밖에서, 특정한 국면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공간에서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전쟁은 바로 나날의 진부한 삶 속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사는 게 전쟁이다’라는 시쳇말에 각인되어 있는 몇 가지의 표지에 주목해보자. 이 시쳇말에서 우리는 전쟁 이후에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 필연적인 구조를 읽어낼 수 있다. 전쟁의 경험은 ‘생존의 감각’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했고 그것이 ‘사는 것’이라는 일상 속에서 상시적으로 치러야 할 전쟁의 다른 판본임을 직감케 한다. 아울러 저 시쳇말은 당대에 유행하는 말(時體)임과 동시에 시체(屍體)가 남겨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아 있음에 대한 부채감을 매번 환기해야 하는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생존’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시효가 만료된 정서에 불과해져버렸다는 데 있다. 바꿔 말해 ‘살아남아 있음’에 대한 부채감이 없는 시대란 삶과 전쟁이 분리불가능한 체제 속에 놓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생존’이라는 것은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표지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존’이 화두가 된 시대는 본능과 양심 사이의 갈등적 구조가 붕괴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결정짓는 생존이 화두가 된 체제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정서가 깃들 장소는 없다. 대신 ‘나만 아니면 돼’나 ‘대박 나세요’라는 슬로건이 그것을 대체한다.
사는 게 전쟁이기 때문이다. IMF 이후 한국사회에 있어 가장 절박한 관심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생존’의 문제로 집약된다. 생존자는 더 이상 생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도 전쟁을 치러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전쟁 속보를 보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금의 삶-공간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맺는 ‘관계의 체위’가 왜 변했는지 묻지 않으며, 항시적인 비상상태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의 상태가 개별자들의 정서와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을 통해 ‘생존의 감각’이 바뀐 것처럼 전쟁을 감각하는 방식 또한 바뀌었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 <클로버필드 Cloverfield>(매트 리브스, 2008)의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자. 갑자기 출현한 괴생물체에 의해 뉴욕 시내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자유의 여신상이 파괴되고 잘려진 머리가 뉴욕 한복판에 떨어진다. 사람들은 이 갑작스러운 재난으로부터 피하는 것보다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잘려져 나온 자유의 여신상 머리를 찍는 데 여념이 없다. 천재지변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이들은 안전지대로의 대피보다 트위터나 블로그에 올릴 ‘인증샷’을 남기는 것에 더 열중한다. 얼핏 ‘유튜브 세대’의 특징을 포착하고 있는 듯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전쟁을 감각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비근한 예로 얼마 전 연평도 교전을 두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설전이 오고 갔던 ‘무개념 논쟁’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평도 교전과 관련해 여성들이 실시간으로 올린 글에 대한 가치평가에 있지 않다. 외려 ‘폭격’과 ‘폭죽’을 등가화 해버리는 이들의 ‘무개념’이야말로 변화된 전쟁의 감각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정부는 청와대 비밀 벙커에 모여 회의(會議)를 소집하고 ‘진돗개 하나’라는 경계태세를 명령했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언제나 ‘진돗개 하나’ 상태라는 것을 은폐할 뿐이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줄타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생활’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돗개 하나’ 상태였고 미래도 낭만도, 심지어 선·후배 관계조차 찾을 수 없는 대학도 지금 ‘진돗개 하나’ 상태다. 당연히 연인과도 ‘진돗개 하나’ 상태다. 진돗개처럼 애써 하나가 되어보지만 비상상태는 해제되지 않는다. 
 

  이 같은 ‘진돗개 하나’ 상태는 오늘날 예술의 조건이기도 하다. 전시(戰時)가 체위의 변화를 수반하듯 전시(展示) 또한 ‘미적 프레임’의 체위를 변화시키는 장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전쟁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전시(展示) 공간 또한 안과 밖의 구분을 할 수 없다. 아니, ‘진돗개 하나’ 상태에서의 전시(展示)란 고정된 전시장에만 한정될 수 없다. <Post War: 총력전 체제와 일상>이라는 기획전이 전시장 안이 아닌 뒷마당에서, 버려진 보일러실을 주요 공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전시(展示)가 고정된 전시장으로부터 이탈해 있다는 것은 전쟁과 일상을 분리할 수 없는 항시적인 ‘진돗개 하나’의 상태 속에서의 ‘전시’란 언제 어디서든 형성되어야 하며, 또 형성될 수 있다는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니 이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낮은 포복을 하듯 몸을 숙여야 한다. 낮은 자세로 흰 천막을 열어젖히는 순간 우리는 곳곳에 널려 있는 작품들과 대면하게 된다. 작품을 보는 것은 우리지만 그것은 기왕의 방식처럼 ‘감상’이라는 일방향적인 행위일 수 없다. 전시장에서의 작품과의 만남은 보는 방식과 관점의 변화, 바꿔 말해 미적 프레임의 전환 및 붕괴를 경험해야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shot)은 관객이지만 쏘는 것(shot)은 작품인 셈이다. 그러므로 전시장 입구에서 취했던 낮은 포복을 전시장을 나갈 때까지 계속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기왕의 전시장에서 행했던 ‘관람’이라는 체위가 이 전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작품과의 대면이란 언제나 미적 프레임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더군다나 여기는 ‘전시장’이며 표적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작품과 만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체위를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이 전시는 하나의 진지(陣地)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진지는 ‘진돗개 하나’라는 상시적인 비상상태에 대한 대응의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기왕의 미적 프레임과 창의적으로 불화할 수 있는 행위가 구현되는 장의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의 전쟁 상태에서 개별자들의 전쟁 수행방식이 점진적이며 유동적인, 부분적인 연결과 동맹을 추구하는 형식을 취해야 하듯 전시장에서도 우리는 ‘진지전’(war of position)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 진지전의 핵심은 부분적인 연결과 동맹에 있다고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우선 작품들이 맺고 있는 ‘체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체위’는 보일러실의 기능조차 하고 있지 못한 음습한 지하 공간에 ‘널브러져’ 있는 이인미([게토ghetto]_슬라이드필름, 가변설치, 2010)와 김경화([이명異鳴]_혼합재료, 가변설치, 2010)
의 작품이 맺는 관계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표정을 포착한 이인미의 슬라이드 사진은 ‘전후’ 복권이 그러한 것처럼 개발의 전제가 초토화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건설의 현장이 폐허처럼 보이는 것은 ‘건설공화국’이라는 명명이 ‘전쟁공화국’의 다른 판본임을 짐작케 한다. 저 도처에 만연한 재개발의 현장은 삶의 공간이 언제라도 폐허가 되어버릴 수 있는 비상상태에 늘 노출되어 있는 우리들의 삶을 환기시킨다. 도시라는 괴물의 제 몸불리기가 슬럼(slum)의 양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재개발의 일상화는 삶-공간의 게토화라는 조건 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게토가 되어버린 우리의 삶-바닥에 김경화의 작업인 시궁쥐의 형상이 겹쳐 있다. 게토를 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이 흉측한 시궁쥐를 만나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어두컴컴한 지하보일러 전시장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백열전등으로 형체가 불분명한 시궁쥐를 비추면 게토가 사라지거나 희미해진다는 데 있다. 시궁쥐는 검고 축축한 느낌으로, 희미한 형상으로 게토가 되어버린 삶의 바닥에 넘쳐난다. 궁지에 몰린 것은 시궁쥐가 아니라 그 사이에 갇혀 있는 우리다. 실제로 이인미의 사진은 하나의 벽면이 아닌 바닥을 포함한 세 면에 걸쳐 입체적인 공간감을 부여한다. 벽과 벽, 바닥이 만나는 곳에서 게토화된 삶의 형상이 일그러진 채 ‘점멸’(漸滅)하고 있다. 게토는 결코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 그 속에서의 삶 또한 검고 축축한 형상으로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인미와 김경화가 맺고 있는 ‘체위’를 경유할 때, 삶-공간의 게토화가 곧 ‘전시’ 상태에 다름 아님을 깨단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하 보일러실은 지상의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하다.

 

  재개발 지역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심의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크레인은 얼핏 ‘중앙 관제탑’처럼 보인다. 그 관제탑의 명령에 의해 지상의 ‘체위’가 결정될 터이다. 김성철의 설치 작업([고립]_혼합재료, 가변설치, 2010)은 이 관제탑에 의해 구성되는 관계가 누구도 만날 수 없는 형태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활주로에 빽빽이 들어찬 비행기들, 이 ‘이륙’이 불가능한 배치는 작품 중간에 세워져 있는 관제탑의 명령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관제탑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지만 외려 활주로라는 체계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장면은 ‘총력전’의 한 국면을 읽어낼 수 있는 메타포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활주로에 총동원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관제탑에서는 더 이상의 명령을 내릴 수 없고 활주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관제탑이라는 중앙 통제 시스템에 맹목적으로 따르다 그 체제에 되먹혀버린 상황 속에서 비행기는 이륙하지 못하고 고립될 뿐이다. 


 

 

  김성철의 설치 작품 맞은편에 걸려 있는 박자현의 평면작업([일상인]_종이에 펜, 2009)이 보여주고 있는 점액(우유)으로 뒤덮여 있는 인물의 형상에서 우리는 가혹한 삶에 곤죽이 되어버린 일상인의 표정과 대면해야 한다. 그 인물은 벌거벗고 있지만, 삶의 ‘벌거벗음’(bare life)이 결코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신체를 재현한 박자현의 작업은 ‘누드화’가 될 수 없다. 달리 말해 ‘관람’이라는 태도로 그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이 벌거벗은 ‘일상인’을 가내수공업적 노동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세밀한 점찍기를 통해 재현되는 대상은 뚜렷한 윤곽을 가진 선이 아닌 산재하는 작은 얼룩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이 작품은 사진과 흡사한 하이퍼 리얼리티(hyper-reality)를 구현하고 있다. 노동자의 노동이 첨단 기계보다 더 정밀한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박자현의 그림은 지난한 노동 작업을 통해서만 대상을 구현(구원이라고 읽어도 좋다) 해내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의 그림을 느긋하게 ‘관람’할 수 있겠는가. 



 

 

  게토화 되어버린 삶-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삶의 피로에 곤죽이 되어버린 ‘일상인’들이나 오물을 뒤집어쓴 채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시궁쥐임에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포신처럼 높이 솟아 있는 목욕탕 굴뚝을 콜라주 하고 있는 정만영의 설치 작업([탕탕탕]_사운드/혼합재료, 가변설치, 2010)은 ‘대포’는 보지 못하고 그 잔해인 ‘연기’만을 보고 있는 우리들의 왜곡된 관점(perspective)을 노출시킨다. 목욕탕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는 마치 대포를 쏜 뒤 나오는 연기와도 같다. 정만영이 콜라주하고 있는 사운드(대포 소리)를 통해 일상-소음 속에 묻혀 있는 전쟁의 소리를 확인하며 지금-여기가 ‘전장’임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폐허가 아닌 곳이 없다. 전쟁과 일상을 분리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은 ‘삶-공간의 진지화’라는 대응 방식으로 요청함으로써 승자독식이라는 폭압적인 삶의 방식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할 수 있는 동력을 비축하고 생산해낼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여전히 ‘전시’(展示/戰時) 중이다. 전시장 밖을 나온다고 해도 전시(展示/戰時)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언제, 어느 곳이든 전시장이 될 수 있다는 조건에 다름 아니다. 전시(展示/戰時)는 주체를, 몸을, 정서를, 관계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니 이 전시(展示/戰時) 이후 당신의 체위(體位)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post war : 총력 체제와 일상>(대안공간 반디 2010.11.26-12.15) 전시 평론


* 국지적 위협이 일어났을 때 발령되는 단계별 경조 조치 중 최고 경계태세를 의미한다. 간단하게 말해 ‘개 같은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음을 가리키며 그것은 국민 모두가 개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때 ‘국민-개들’은 주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평상시에 ‘진돗개 셋’이 발령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 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주해연 옮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산책자, 2008. 
*** 도미야마 이치로, 임성모 옮김, <<전장의 기억>>, 이산, 2002.
****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20쪽.





'던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취향의 몰락  (0) 2011.03.31
검은 손의 운지법  (0) 2011.02.08
익사(溺死)해버린 익명(匿命)을 구하라  (0) 2011.01.23
바보야! 문제는 자백이 아니야  (0) 2010.04.12
위대한 스승이 보낸 편지  (0) 2010.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