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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기

취향의 몰락

by 종업원 2011. 3. 31.

 

 

 아마도

보충수업비나 문제집을 사야한다는 구실로 얼마의 비용을 전용한 것이겠지만 고교시절, 어떻게 하루도 빠짐없이 음반을 살 수 있었는지 아무리 셈을 해봐도 방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음반의 출처를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록음악을 처음 들었던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그 매혹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고 그것이 세속의 셈법과 불화하는 것이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메탈리카(Metallica)’로부터, 혹은 ‘딥퍼플(Deep  purple)’을 거쳐, 아니 ‘라디오헤드(Radiohead)’와 함께 음악적
계보도를 나름의 방식으로 그려가던 그 시절,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정보는 <핫뮤직>이나 <GMV>와 같은 음악 잡지 몇 권이 전부였다. 새로 출시된 음반 소개 기사 하나까지 꼼꼼하게 읽었던 탓에 새로운 잡지가 나오는 한 달이라는 주기가 내겐 너무도 짧았다. 더군다나 넉넉하지 못했던 주머니 사정으로 늘 Tape 형태로 된 음반만을 산 터라 음악을 듣는 속도 역시 새로 출시되는 음반들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빨리감기’라는 기능은 Tape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위험 탓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한 음반을 다 듣기 전에는 새 음반을 사지 못했다. 먼 나라의 고딕 메탈 밴드의 새음반 출시 기사까지 빼놓지 않고 읽었던 그 시절, 듣기평가 Tape은 빨리 감되 음반 Tape만큼은 결코 빨리감기를 하지 않았던 그 안간힘과 함께 ‘취향’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무릇 ‘취향’이란 셈법이 불가능한 것! 

  
  새삼 이 궁색한 취향의 출처를 톺아본 것은 ‘아이팟(ipod)’이라는 기기를 사용하면서 느낀 소회 때문이다. 소장하고 있는 음원 파일을 다 넣어도 여유 공간이 남아 있는 이 광대한 기기를 호주머니 속에 간편히 넣고 다니며 음악 듣는 동안 나는 생각지도 못한 괴로움과 늘 대면해야만 했다. 그 괴로움이란 익숙해지지 않는 작동법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흥미롭게도 ‘아이팟’의 가장 큰 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출처로 한다. 이 작은 기기 안에 너무 많은 음원이 들어가 있는 탓에 무엇을 들을 것인지 선택하기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것!
 


  지금 내가 가진 ‘아이팟’ 안에는 6천곡이 넘는 음악이 들어가 있다. 문제는 이 많은 음악을 언제 어디에서라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금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0곡 남짓한 음원이 겨우 들어가던 낡은 mp3 기기를 들고 다닐 때는 한곡을 새로 넣거나 뺄 때조차 얼마간을 고심 하곤 했는데, 그 별 볼일 없는 궁색한 고심은 내가 어떤 음악을 소장하고 있는지, 그 중에서 지금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팟’이라는 기기를 사용하다보니 그 궁색한 고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아울러 ‘선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자각하게 된다. 

  음원을 ‘선택’ 하기 위해 아티스트 항목이나 앨범 항목을 한참 뒤져본 후 눈에 띄는 음원을 선택하여 플레이를 누르지만 그리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좀 더 좋은 음원이 ‘아이팟’ 속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기에 나는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곡을 선곡하기에 여념이 없다. ‘듣기’가 빠지고 ‘선택’을 위한 행위만이 남아 있는 꼴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랜덤 모드(random mode)로의 전환이다. 선택하는 것이 너무 힘겹기에 그 결정을 기기에게 떠맡긴 것이다. 
 

 
 

랜덤 플레이로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선곡은 내 의지가 아니기에 듣고 싶지 않은 음악이 나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곡을 선곡하면 되고 조금이라도 좋은 음악이 나오면 그 우연성에 기뻐할 수 있으니 랜덤 플레이도 그리 나쁘지 않다. 랜덤 플레이의 편리함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이 형식이 새삼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자각하게 된다. 가령, 우리가 매일 되뇌는 ‘뭐먹을까?’라는 물음 또한 랜덤 플레이적인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먹을까’라는 물음이 ‘아무거나’라는 대답과 짝을 이룬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 일상적인 물음이야말로 선택할 것이 너무 많은 환경 혹은 구조로부터 재생산되는 고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무거나’라는 ‘선택’은 실은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혹은 선택할 수 없는 ‘무기력’을 의미한다. 선택할 것이 너무 많기에 외려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을 ‘무선택의 선택’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랜덤’에는 선택의 피로감이 묻어 있다. ‘아무거나’라는 무선택의 선택이야말로 ‘랜덤’이라는 ‘풍요’가 실은 너무 많은 정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선택이라는 결정권을 박탈당한 채 무한히 증식되는 정보들을 꾸역꾸역 삼켜야만 하는 우리들의 곤궁한 처지를 가리킨다. 그러니 ‘랜덤’이라는 선택의 피로감은 자본제적 체계의 피로감이라 바꿔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 이 ‘무선택의 선택’ 속에 ‘차이’를 통해 무한 증식하는 자본주의 체계의 알짬이 숨어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을 때 그 결정권을 체제에 맡겨버리는 것. 랜덤(random)이라는 형용사 뒤에 흔히 플레이(play)라는 동사가 붙는 이유를 이러한 맥락에서 숙고해야 한다. 랜덤 플레이라는 조어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무선택의 선택’이 마치 선택인 것처럼, 주체적인 결정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랜덤 플레이라는 조어야말로 체계에 되먹히는 개별자들의 군상을 적확하게 담지한다고 하겠다. 
 


  ‘랜덤’이라는 형식과 ‘아무거나’라는 일상적 용법은 얼핏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이 모종의 연관 속에서 긴밀한 관계를 밎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아무거나’라는 무한 포용의 제스처 속에는 상대의 의견을 통하지 않고는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랜덤 플레이가 주관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상대가 무언가를 제시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으며, 또 선택하지 못한다. ‘아무거나’라는 시쳇말이 ‘차이’를 밑절미로 하는 자본주의 체계로부터 나온 것임을 상기할 때 이 용어가 일상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들의 행동 양식, 혹은 습관과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거나’라는 진술과 그 위에 얹혀져 운신하는 자본주의 체계에 결박당한 개별자들은 오늘도 ‘무선택의 선택’을 자신의 특권인 것인 냥 마음껏 낭비한다. 비록 한정된 정보이지만 그것들을 아끼며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하나하나 실행해 가면서 더디게 구축해갔던, 셈법이 통하지 않는 ‘취향’이 단 몇 달 쓴 ‘아이팟’의 무한 용량에, ‘랜덤 플레이’라는 체계에 되먹히며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daum cafe <비평고원> 화요논평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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