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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기

검은 손의 운지법

by 종업원 2011. 2. 8.
 

 

 


  아코디언은 주름진 공기 주머니(벨로즈)에 바람이 담겨야 소리를 낼 수 있다. 양 손을 접었다 폈다하는 행위가 악기에 숨을 불어넣고 손가락들이
악기에 가득 찬 바람의 몸 여기저기를 열고 닫을 때 미약하지만 오래된,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악기에 숨을 불어 넣는 지난한 손의 노동과 손가락의 섬세한 보살핌에 의해 ‘고유한 음’이 만들어진다. 아코디언을 ‘손풍금’이라고 부를 때 한결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이 악기가 노동(손)과 돌봄(손가락)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악기는 저마다의 공명통을 열고 닫음으로써 음(音)을 생성해내는데, 이때의 음은 ‘손의 돌봄’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목소리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다. 목소리는 숨이 들고 나오는 길목에서 길어 올리는 것인 터라 숨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숨이 들고 나오는 곳은 밖과의 교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지는 근원적인 장소일 터, 숨소리는 내가 아닌 것들과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손의 움직임(노동)과 같은 리듬을 갖는다. 다시 말해 손의 형상에서 그 사람의 숨소리를 읽어낼 수 있고 목소리 또한 가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절창(絶唱)은 목소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노동)이 만드는 셈이다.


  이대흠의 <<귀가 서럽다>>의 저류에 흐르는 주조음은 특정한 소리가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손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귀가 서럽다’는 문장은 밖으로부터 밀려드는 것들을 전부 감내할 수 없다는 토로라기보다 수많은 사물을 돌보아 온 손이 지나쳐왔던 길목(‘손길’)에 대한 뒤늦은 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따라서 ‘귀가 서럽다’는 문장은 시집 전체를 주관하는 하나의 테제가 된다. 이때 ‘귀’라는 주어의 자리는 대상과 맺어왔던 관계가 특정한 방식에 기대어왔음을 가리키는 반성의 자리에 다름아니며 ‘서럽다’는 서술어 또한 그러한 회한과 함께 ‘나’의 임계를 넘어선 자리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발현되는 장소이다. 이 ‘서럽다’는 형용사는 슬픔을 표출하는 서정적 자아의 내면 풍경을 그리는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을 무너뜨리는, 다시 말해 우리 ‘귀’의 가청 범위를 넘어서는 음역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껏 ‘귀’로 했던 일들을 어떤 이는 ‘손’으로 해왔다. 그 손엔 “울음이 많이 쌓였”으며 그렇게 검게 변한 손이 실은 아픈 것들을 다 받아낸 ‘귀’였음을 시인은 뒤늦게 자각하는 것이다(“뿌리는/얼마나 많은 귀일까”, 「고매(古梅)에 취하다」). ‘뿌리-손’은 모든 것을 견딤으로써 존재를 지탱하지만 땅밑에 있기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가장 낮은 바닥에 내려 두는 존재들의 손은 대상을 쥐는 것보다(소유) 살려내는 것에 집중한다. 바닥에 있는 존재들은 다른 것들을 떠받들어 살려 냄으로써 정작 자신은 검게 변한다. 검게 변한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의미하는 것일 터, 검게 변한 손은 자신을 비워 다른 것을 살려냈음을 가리키는 증표인 것이다.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게 슬슬 들어올려 떠받”(「비빔밥」)드는 손의 노동, 소유(죽임)가 아닌 돌봄(살림)에 집중하는 ‘검은 손’에 의해 ‘쓰레기’가 ‘밥’으로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밥과 쓰레기」).


  검게 변한 주름진 손, “갈리진 손바닥 틈”(「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에 ‘나’ 아닌 것들이 깃듦으로써 ‘고유한 음’이 만들어진다. 대상을 떠받들면서 살려내는 손의 노동이야말로 악기를 연주하는 운지법(運指法)이지 않겠는가. 모든 악기가 구멍의 돌봄을 통해 음을 만드는 것처럼 운지법은 불완전한 것들, 결여된 것들, 상처들과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고유한 음’을 생성한다. 주법이 깃들 수 있는 것은 너와 나의 불완전함, 결여, 구멍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다.


  그러므로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검은 손’으로 숨을 불어 넣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 익힌 제 각각의 운지법은 대상과 맺는 소통방식일 터, 운지법이 잘못되었을 때 악기는 ‘음’이 아닌 비명을 질러대기 마련이다. 시인 또한 대상과의 관계를 나름의 운지법을 통해 노래로 만들어내는 악사가 아니던가. 이대흠이 ‘검은 손’에 자꾸 눈길을 주는 것은 자신의 ‘검은 활자’가 ‘살아라(生)’는 ‘명령(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반해 어미의 검게 변한 손은 “잡다한 것”을 품어 안음으로써 그것들을 되살려내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검은 손’을 애워싼 주름은 “더 받아들이려 표피를 늘인 것”이며, “받아들인 아픔이 층을 이룬”(「주름」) 지난한 노동의 흔적이다. 주름이 많다는 것은 “잡다한 것”을 오랜 세월 받들어왔음을 의미한다. 나를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 흘러넘치는 것, 내가 너 안에 들어가 “섞여 지워지는 것”(「물무늬 손바닥―싸리재」), “서로가 서로를 우려 이미 분리할 수 없게”(「비빔밥」) 스민 상태가 되는 것은 “흐려서 깨끗한 물”(「물의 길」)처럼 ‘나’와 ‘너’를 살리는 일이다. 시인은 그 손의 주름에 귀를 대고 고유한 운지법을 받아 적는다. 그러나 검은 활자로는 그 말을 다 담아낼 수 없다. 시인이 ‘귀가 서럽다’는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은 어미의 검게 변한 손에 돋아 있는 ‘귀-주름’에 대한 안타까움과 간곡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며 그 안타까움이 손의 말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회한과 반성의 자리로 자신을 이끌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은 구강포쯤 가야 이해가 된다’는 대목(「비가 오신다」)이나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이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하는 것(「바닥」) 또한 고유한 운지법을 체득하지 않고는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 역시 <<귀가 서럽다>>의 여러 운지법 중에 하나라고 불러도 좋을 텐데, “맞춤법도 없는 편지”(「오래된 편지」)가 우리를 곧잘 울리는 것은 결여되고 남루한 형상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손의 운지법’을 우리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입으로 쓰시는 편지”라는 대목의 ‘입’을 ‘손’이라 바꿔 읽어도 무방하리라. 그 말을 “양면지에 옮기는 일”은 어미의 ‘검은 손’에 제 귀를, 제 손을 포개어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찌 귀가 서럽지 않겠는가.


 런 점에서 “아이를 낳아보고 싶습니다”(「봄」)로 시작하는 시집의 첫 번째 시에서 새로운 것을 낳고자 하는 신생(新生)의 의지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살려내고 숨을 불어 넣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검은 몸’을 가짐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살려내는 우주를” 낳고 싶다는 ‘바람(wish/wind)’은 제 몸 헐어 ‘숨’을 불어 넣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 “몸을 다 울어 하늘빛이 될 때”(「남천」)야 가닿을 수 있다는 ‘남천(南天)’은 마음의 도원이 아니라 ‘나’라는 개별자의 영역을 넘어선 죽음과 가까운 곳임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신생에 대한 열망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딛을 때만 가능해진다. 이런 사실은 이대흠의 <<귀가 서럽다>>를 전통적 서정시의 회귀로만 읽어내는 독법을 위태롭게 만든다. 이는 서정을 통해서도 ‘나’의 임계를 넘어서는 자리에 가닿을 수 있는 경로를 현시하는 바, 그곳은 서정시를 둘러싼 여러 논의들에서 서둘러 규정짓곤 하는 상투화된 범주가 필연적으로 거쳐야지점인 것이다.



<<창비>>(148호, 2010)에 기고


 

  이 글의 서두는 심성락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pony canyon, 2009)에 빚지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그 내용을 밝히지 못했다. 넘치는 원고 매수를 줄여달라는 편집자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심성락의 아코디언 연주와 이대흠의 시를 녹여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모 신문에 연재하고 있던 <문화비평> 칼럼에 심성락의 아코디언 연주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했으나 그 또한 무산되었다. 수십년 간 반주를 해오다 대가가 되어버린 연주가의 궤적을 기술하는 것이 너무 버거웠다. 그렇게 세상의 아버지들은 '서사'를 가지지 못하고 고작 좁은 액자나 한 평도 안되는 관 속에서 점점 어두워지다 사라져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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