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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제는 문장이다

by 종업원 2011. 5. 22.

 

 





  문제는 문장이다(이 문장이 비문으로 읽힌다면 그 사람은 필시 ‘문장’을 한갓 명사로만 간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시인의 말처럼 문장에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명확한 사건을 본 적이 없다.

사건 다음에 문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긴다. 어떤 문장은 매우 예지적이다.

어떤 문장은 매우 불길하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 그것은 조금 더 불행해졌다.

―김언, 「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적이 없다」 부분, <<소설을 쓰자>>, 민음사, 2009.


 


  문장에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시인의 머릿속은 대개 ‘문장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시를 쓸 때도 그는 문장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김언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변주해보자. ‘시를 쓰기 위해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문장 다음에 시가 만들어진다.’ 그가 불현듯 ‘소설을 쓰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 문장을 ‘전위’의 문맥으로, 혹은 의미심장한 ‘전향서’로 이해했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이라는 단어에 붙들려 ‘문장’이라는 단어를 망각하고 말았다. 그가 ‘소설을 쓰자’고 한 것은 만약 ‘문장을 쓰자’라고 한다면 그 <문장>이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언의 형식이 필요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여전히 ‘문장’은 주어의 자리도 갖지 못하고 동사가 되지도 못한다. 그러나 다시, 문제는 문장이다(아직도 이 문장이 비문처럼 읽히는가!).


  그의 문장이 스캔들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불현듯’이라는 부사에 있다고 하겠다. ‘전위’와 ‘전향’의 수신자들로부터 오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그들의 ‘이해’가 일시적이고 이벤트적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김언은 가끔 이해될 뿐이다. ‘소설을 쓰자’는 문장은 그가 지속적으로 써왔던 문장들의 변주임에도 분분한 수신자들은 그것을 ‘전위의 선언’으로, ‘이벤트성 전향서’로 이해(異解)했던 것이다.*
저 ‘불현듯’이라는 부사를 뺄 수 있을 때 김언의 문장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김언이 썼던 문장들은 축적 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불현듯’이라는 부사의 출처가 여기에 있다(“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열두 명도 되지 않는다”, 「라디오」, <<소설을 쓰자>>). 그의 문장은 오직 선언문이라는 ‘코스프레(costume play)’의 형식으로만 가끔 전달 될 뿐이다. 그것은 그가 “논리와 오류를 함께 내장한 문장”(「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적이 없다」, <<소설을 쓰자>>)을 쓰기 때문일 텐데, 이 대목을 “비정상이 어쩌면 나의 정상이다”(「詩도아닌것들이―문장생각」)나 “벽 뒤에는 그러나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詩도아닌것들이―탱크 애벗의 이종격투기」)는 문장과 함께 읽을 때, 그의 문장이 지면에 안착하지 못하는 이유에 다가갈 수 있다. 김언은 공동체의 문법(‘시란 ∼이다’)에 반하는 ‘소설을 쓰자’라는 외설적인 문장을 통해 이미 벌어지고 있는 ‘어떤 사건’과 조우하고자 한다. 그 ‘비정상’을, ‘벽 뒤의 사건’을 ‘소설을 쓰자’는 그 구호를 김언의 ‘시적 자리’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길을 닦아서 공기와 빛이 드나들게 하는 것, 그 길을 따라서 상가가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지나가고 마침내 군대가 지나가는 것이 이 도시가 만들어낸 우리들의 목표다.

―「퍼레이드」 부분, <<소설을 쓰자>>


 

  ‘이 도시가 만들어낸 우리들의 목표다’라는 구절은 얼핏 문법에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생소한 비문(非文)이, 그렇기 때문에 틀린 것으로 규정되는 그 어법(語法)이 ‘도시라는 시스템’의 알짬을 현시한다. 각각의 개별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진보적인 가치’나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목표’들은 개인의 의지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도시의 목표’라는 것이다. 아름다움, 혹은 소통이라는 가치중립적이고 보편타당한 것들에 대한 신화화된 믿음 또한 ‘도시’라고 통칭되는 자본제적 시스템이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구조이며 ‘우리들’은 그 가치 구조를 종교처럼 맹신하고 있는 셈이다. ‘이 도시가 만들어낸 우리들의 목표다’라는 어색한 비문(秘文)으로부터 ‘우리의 목표는 도시가 만들어낸다’는 ‘벽 뒤의 문장’을 캐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언에게 있어 문장을 쓴다는 것은 시라는 양식을 구축하기 위해 수반해야 하는 도구가 아니라 “끊임없는 실천의 연속”이며 “문장이 곧 바로 행동이 되는 연습”(「동반자―詩도아닌것들이 · 07」, Sedna, <<기괴한 서커스>>, 사문난적, 2010)에 다름 아니다. 그가 “불구의 문장들”을, “앞뒤가 안 맞는 문장들”을, “정상과 거리가 먼 문장들”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으로 치면 장애인과 다름없는 문장들’, 그러한 비문에서 문장을 발견하고, 장애인에게서 인간을 발견하는 탐색 혹은 도약은 곧 시에 관한 탐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가 쓰는 문장은 ‘공동체의 (문)법’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시에는 편입되지 못하는 이 무국적인 인간들”(「詩도아닌것들이―문장 생각」)이 배회할 수 있는 자리는 특정한 계층 혹은 부류들이 교환하는 지역적인 언어인 ‘사투리’의 승인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투리가 원시적으로 극대화된 ‘방언’들이 부대낄 수 있는 자리, 그곳에서 ‘유령’과 ‘미친년’과 ‘촌놈’들의 말이 국적의 사슬에서 벗어나 교환된다. 무국적이기에 교환가능한 문장을 ‘김언의 시’라고 불러도 좋다.


  김언은 그곳을 “두 번째 고향”(「그래, 그래, 몇 개의 록」, <<기괴한 서커스>>)이라 명명했다. 이주민들의 방언이 교환되는 그 (문학의) 공간은 그럼에도 “도시의 색깔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 무국적 인간들은 국경 너머의 초월적인 공간이 아닌 국경의 내부에서, 도시 안에서 모국(母國)을 이국(異國)처럼 배회한다. 하여 그는 이방인이 그러하듯 결코 ‘토지 소유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토지 소유’란 물리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방인은 토지(상징형식)를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 결여는 그에게 특별한 성격의 기동성을 부여해준다(“모든 것이 장애물이면서 하나의 동기가 된다.” 「그래, 그래, 몇 개의 록」). 아울러 그는 근원적으로 집단의 특수한 구성 요소들이나 특수한 경향들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객관성’이라는 특별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짐멜). 모국어의 최전선에 한 시인이, 그의 문장이 척후병으로 나가 있다. 그(시)에게는 국적이 없다.

 

*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문장에서 인생이 보인다면, 세계가 보인다면 나는 소설을 쓰는 것처럼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詩도아닌것들이―문장 생각」, <<거인>>, 랜덤하우스중앙, 2005.

 



<문장과 얼굴-지역, 모더니즘, 공동체> 부분, <<세드나>> 2호(미출간)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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