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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곧 더 큰 파도가 온다면

by 종업원 2017. 11. 16.

2017. 11. 15

 

 

사박사박

 

 

시는 갈팡질팡이

아니라

사박사박 어딘가로

자기도 모르게 붙좇아가다가

뜻밖의 곳에 이르러

가지고 있던 것 내던지고

입고 있던 옷 다 벗어버리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로

뛰어드는 것.

김연희, 넷째의 집, 꾸뽀몸모, 2017

 

 

사박사박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누군가가,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일까? 어쩌면 아이가 자신의 입보다 큰 과일을 베어무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소리라기보단 몸짓에 가까운 기미를 감지할 수 있는 생활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생활의 귀에 관해서 말이다. 아마도 시인은 오랫동안 갈팡질팡 했을 것이다. 생활에서도, 시 쓰기에서도 말이다. 사박사박은 갈팡질팡의 이력 속에서 얻게 된 감각이기도 하겠다. 나는 여기서도 무용한 것의 쓸모를 발견하게 된다. 당장의 성과는 미진하다 할지라도 나름의 일관성 속에서 습관과 버릇을 조형할 때 뜻하지 않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박사박이라는 시 속에서의 사박사박은 바깥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이거나 바깥에서 온 것을 바투 좇아가는 소리일 것이다. 생활 안으로 들어온 바깥의 존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 생활은 고립과 폐쇄의 위태로움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다. 시적 화자가 뜻밖의 곳에 이를 수 있는 것 또한 바깥에서부터 온 것의 소리를 좇아 따라 나가봤기 때문이다. 생활은 바깥과 차단되어 있는 밀폐된 골방이 아니라 내밀한 통로에 가깝다.

 

 

생활 속에서 소리없이 영그는 생산성은 바깥에 내어놓고 뽐낼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생활은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찾아왔을 때 내어놓는 다과(茶菓)처럼 꾸밈없는 표정과 형편일 뿐이다. 김연희의 사박사박」에선 얼핏 생활가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뜻밖의 곳에 이르러 / 가지고 있던 것 내던지고있을 뿐 아니라 눈앞의 펼쳐진 바다로 / 뛰어드는 것이라고까지 하니 주변을 살피고 돌보며 써내려간 그간의 시와는 조금 다른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사박사박 좇다가 당도하게 된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어디일까? 그곳은 지금-이곳과 다른 이국의 바다이거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해방구인 것일까?

 

 

그 뜻밖의 곳은 분명 생활과는 먼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시를 조금 다르게 읽어보고 싶다. 생활의 물결과 파도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생활을 현장으로 살아내고 있는 이는 생활의 물결과 파도에 몸을 맡겨본 사람이기도 하다. 생활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도약대나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가 아니다. 자신의 생활을 장소화할 수 있을 때 그곳은 현장이 된다. 생활은 고여 있는 웅덩이 또한 아니다. 언제나 너울대고 있다. 때론 큰 파도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기도 한다. ‘생활이 무너진다는 건 외부적인 충격 때문에 발생하는 부수적인 피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생활은 바다처럼 알 수 없는 심연을 감추고 있다. 잔잔한 바다처럼 뻔해보이면서도 돌연 휘몰아치기도 해서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란 생활과 맞서고 있는 곳이 아니라 생활의 심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생활을 현장으로 살아내는 이만이 만날 수 있는 생활 속에 펼쳐지는 바다 말이다. 김연희 시인의 시 쓰기는 생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바다를 만나고, 또 그 바다에 뛰어들어보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 생활 속에 곧 더 큰 파도가 올 것이다. 생활을 단박에 집어삼켜버릴만큼 거대한 이 파도를 막아내거나 이겨낼 방법은 없어보인다. 그러니 타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생활의 물결을 몸으로 익히고 있는 이만이 생활의 파도를 탈 수 있다. 생활의 파도를 탈 수 있는 이만이 생활의 바다로 뛰어들어 가지고 있던 것 내던지고 / 입고 입던 옷 다 벗어버리고한동안 놀 수 있다. 그렇다, 생활은 언제라도 빠질 수 있는 위험한 바다이면서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영감의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