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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다―이별례(8)

by '작은숲' 2016. 1. 27.
2016. 1. 26


자고 일어나니 벌레가 되어 있더라는 ‘그레고르 잠자’만큼은 아니겠지만 과할정도로 진했던 눈썹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홀라당 다 빠져버렸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의 황망함을,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던 그 당혹스러웠던 순간을 가만히 기억해본다. 거울을 얼마나 자주, 또 자세히 들여다보느냐와 상관없이 자신의 얼굴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이 속해 있는 체제의 구조를 안다는 것의 어려움과 다르지 않다.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이 그대로 앎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늘 있던 그 자리에선 영영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영역이 있다. ‘얼굴’은 이/목/구/비로 이루어진 표면적인 조합이 아니라 시스템의 명령이 들어오고 나가는 영역(들뢰즈/가타리)이며 고유한 것과 공통된 것이 차이나지 않게 함께-있는 공동체의 장소(아감벤)다. 말할 것도 없이 얼굴은 자아와 외부가 만나고 충돌하는 격전지이자 문턱이며 출/입의 이력이 고스란히 쌓이는 기록지이기도 하다.

내 얼굴을 내가 알게 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사진에 우연히 찍힌 (납득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에 몰랐던 진실이 오롯한 것처럼 자아의 의도를 비켜갈 때 잠깐 ‘얼굴(진실의 구조)’이 스치듯 번뜩이며 드러난다. 세속적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얼굴 또한 무너지거나 몰락의 비용을 치를 때만 품고 있던 진실을 얼핏 보여줄 뿐이다. 진리가 아닌 진실이야말로 느닷없이 불현듯 찾아오는 불청객이자 타자 아니겠는가. 자아의 영원한 타자인 ‘몸’의 진실은 앓음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원형 탈모처럼 텅 비어버린 눈썹을 바라보며 혹독한 결별의 이력을 떠올리는 건 원인 파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재구성하는 자아의 도착(倒錯)이자 증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재난처럼 들이닥치는 관계의 (파행적) 구조 변동이 얼굴에 남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휑한 눈썹의 텅 빈 자리에 드러난 얼굴의 진실과 마주한다. 만남과 부딪침, 함께-있음의 동시성이 오롯하게 남아 있는 자국들, 상처들. 커다랗게 구멍 뚫린 몰락의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보는 시간. 먹지 못하고 잠들지 못했던 어느 때의 참혹했던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거나 증오와 원한의 정서로 까맣게 지워버릴 수도 있었던 몰락의 이력을 회억하며 더듬어가는 일이니 지금 내 앞에서 텅 빈 눈썹의 상처 받은 빈 터를 비추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거울이 아니다. 몰락하는 사물이 구조를 보여주는 것처럼(김영민/벤야민), 앓음의 이력(상처)은 자아에 계류되어 있는 것이 아닌 바깥으로 열리고 안으로 불러들였던 ‘몸’이라는 문턱의 장소에 쟁여져 있는 관계의 진실을 비춘다. 말하자면 몸이라는 타자가 비추는 관계의 진실을 거울을 매개로 잠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지금 내 얼굴은 허물을 벗듯 피부가 갈라지고 허연 살비듬과 같은 각질로 뒤덮여 있다. 건성인지 아토피인지 알 수 없는 피부 질환을 앓게 된지 2주가 넘어가고 있다. 울긋불긋 부풀어오르며 가려움과 따가움을 동반하는 얼굴의 표면을 비춰보며 ‘납득할 수 없다’는 말만 속으로 되새김질 할 뿐이다. 얼굴이라는 문턱이 벗겨지고 무너지고 있다. 원형 탈모와 같던 눈썹의 텅 빈 자리는 몰락의 징조였던 것! 짐짓 무관심한척 해보지만 무너지고 있는 문턱 너머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큰 물결이 덮칠 것만 같아 노심초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재난이 참혹할만큼 갑작스럽다고 해도 그 이후를 감당하는 시간은 더디고 더디지 않은가. 차마 원망과 증오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다 해도 서둘러 회피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낭만적으로 미봉하지 않으려는 애씀. 필사적이었던 '마주봄의 시간' 또한 얼굴에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러니 늙음이 그러한 것처럼 얼굴의 몰락이 재난인 것만은 아니다. 몸이 변한다는 것은, 그 결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별 없이, 이별에 대한 예(禮)를 다 하는 일 없이 몸(體)의 결(質)이 변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희멀건 각질로 뒤덮인 낯선 내 얼굴을 마주보며(face a face) 이별의 이력을 더듬어 본다. 거기엔 언제나 두 사람이 있다. 떠나는 이와 도망치는 이. 떠나는 이는 검질기게 대면하고 마주한 이들이며 도망치는 이는 갖은 이유로 결별을 정당화하는 성벽을 쌓는 데 집중할 뿐이다. 관계의 어리석은 타성은 도망치는 이를 뒤쫓기 마련이다. 도망치는 이의 뒷꽁무니를 보며 쫓아가는 다급함은 자아가 번성하는 패턴과 조응한다. 반면에 애쓰지 않으면 수행할 수 없는 검질긴 마주봄에선 어느새 근기의 의욕이 움튼다. 그런 의욕이 움튼 자리에서만 관계의 온기를 희망할 수 있다. 나를 알던 이가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 그건 절망의 증표도 아니며 서둘러 희망이라 부를 수도 없다. 궁구해야 할 지점은 필사적인 마주봄으로 이별례를 다-행할 때 내가 알았던 이를 더 이상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다. 어리석은 망각도 아니며 낭만적인 미봉으로서의 화해도 아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은 결국 낯선 나'를' 만나는 일이며 낯선 나'로'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만남의 희망은 오직 그 순간에만 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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