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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

by 종업원 2016. 8. 15.

2016. 8. 15




“가끔씩 이야기는 무너지고, 우리가 패배했음을, 끔찍한 상황에 처했거나, 우습게 되어 버렸거나, 길을 잃었음을 인정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또 가끔은 구급차나 하늘에서 떨어진 보급품처럼 변화가 찾아오기도 한다. 적지 않은 이야기가 침몰하는 배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주위에 온통 구명보트가 떠 있는 상황에서도.”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김현우 옮김, 반비, 2016), 14쪽



쓴다는 것의 희망에 관해 내밀하고도 방대한 사례들을 사려깊은 손놀림으로 정성을 다해 뜨개질한  리베카 솔닛의 역작, 『멀고도 가까운』에서 나를 사로잡은 대목은 이야기의 절망에 관한 것이었다. ‘적지 않은 이야기가 침몰하는 배를 닮았다’는 문장을 옮겨두고 며칠을 보냈다. 이야기가 구원이 아닌 침몰과 연결될 수도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던 순간은 이야기에 관한 내 사유의 게으름이 들통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올해에 출간될 첫번째 평론집 원고를 정리하며 내 글이 형체나 실체가 없(어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의탁하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의 황망함과 부끄러움 또한 이와 비슷한 것이었을까. 줄곧 연약하고 희미한 것들에 대책없이 기대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계속 싸워왔다. 불리한 싸움을 계속 해왔다.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열정적이고 더 격렬해질 수 있었다. 그 열정과 격렬함이 내 능력이라 생각했다. 나는 거의 모든 싸움에서 졌고 그 이유를 짐짓 연약하고 희미한 것들 탓이라 생각해온 듯하다. 저 연약하고 희미한 것들을 지켜야겠다, 더 분명하고 단단하게 키워야겠다 다짐했던 숱한 밤들도 나는 홀로 열정적이었고 격렬했다. 불리함의 알리바이에 빠져 지는 싸움을 낭만화 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냉담하고 냉철해지는 나날 속에서 소중한 것이 희박해져감을 가파르게 알게 된다. 


불리한 싸움의 역사는 나를 우울의 나락으로 침몰시킨다. 내가 나의 적이 된다. 나는 나의 적에게 가장 하찮고 나약한 존재다. 나는 매일 손쉽게 진다. 패배는 만성화되고 무감각해진다. 이제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다만 게으를 뿐이다. 불리한 싸움을 멈추는 순간, 이길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절망의 크기가 더 크다. 연약하고 희미한 것들이 지긋지긋 하게 느껴질 때, 냉철하고 냉담하게 그것들을 바라보게 될 때 이길 수 없는 모든 싸움은 쓸모 없는 짓이 되버리고 만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맞서 싸우기 위해, 계속 싸우는 것을 통해서만 승리가 발명될 것이라는 믿음을 져버린 것일까. 나약한 게으름 속에서 생각하게 된다. 불리한 싸움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불리한 싸움을 이어나가는 일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침몰하는 이야기란 이야기 하기를 멈춘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 하거나 이야기 하는 행위가 시시하게 여겨지는 순간, 우리는 이야기와 함께 침몰한다. 이때 희미하고 나약한 것들은 귀신처럼 그 기미를 알고 가파르게 녹슬어 무거운 쇳덩이가 되어 침몰을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발명하기 위한 불리한 싸움이라는 급진적인 시도는 우습고 하찮은 것이 되어버려 조악한 구절이 새겨진 단체 티셔츠처럼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 


연약하고 희미한 것들에 기대어 불리한 싸움을 할 때, 질 줄 알면서도 싸움을 이어갈 때가 가장 강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불리한 싸움의 역사가 우습고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는 동안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불리한) 싸움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선 우선 부지런해야 한다. 내게 부지런함이란 축적되어 결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청소처럼 금새 더럽혀져 그 애씀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것이었고 요리처럼 누군가의 입속으로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은 것이야말로 내 싸움의 유일한 전리품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 저것을 챙기고 돌보는 일에 부지런을 떠는 것. 그건 거대한 구조선을 타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무보트를 타고 노를 저으며 바다에 떠 있는 일에 가깝다. 이 거대하고 폭압적인 망망대해에서 희미하고 연약한 것들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타고 있는 고무보트는 조난당한 것과 차이가 없다. 조난당한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표류는 항해가 된다. 연약하고 희미한 것들에 기댈 때만 부지런하고 불리한 항해가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도움을 구하는 이가 언제나 누군가를 먼저 돕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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