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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같이 있음의 세계-윤이형, 「대니」

by 종업원 2016. 3. 16.

2016. 3. 16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주인 없는 집 담장 안에 소담스럽게 핀 능소화(능소화가 뭐죠? 잠깐만요, 이제 알겠어요.) 꽃집 진열대에 걸린 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견디는 벌레잡이통풀의 벌레 주머니(왜 호기심 어린 시선이에요? 왜 견디죠?). 집 나간 고양이를 걱정하는 옆 건물 노파의 울음소리(어떻게 생긴 고양이였어요?).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목소리(찾았나요?). 잠든 아이의 이마에 살짝 배어난 땀냄새(그건 나도 좋아해요). 그런 아이를 보고 웃는 마음 착한 청년의 긴 손가락.”
-윤이형, 대니」,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37쪽.

 


한편의 소설을 읽으며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두근거림’이다. 가끔 그것은 ‘초조함’의 모습을 띠고 도착하기도 한다. 쓰는 사람이 쓰고 있는 동안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또한 ‘두근거림’이 아닐까, ‘초조함’과 ‘두근거림’ 사이에서 위태롭게 헤매며 쓸 때에만 ‘쓴다는 것의 지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짐작도 해보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음에도 두근거린다.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빨리 낚아챌 수도, 서둘러 다가갈 수도 없다. 그래서 빨리 읽을 수가 없다. 두근거림은 궁금증이 아니기에 망설이고, 몸을 움츠려 조금 떨면서 조심스레 읽어갈 수밖에 없다. 윤이형의 <대니>를 그렇게 읽었다. (작가 또한 이 소설을 두근거리고 망설이며 썼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한 노인과 AI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손자를 키우는 노인과 스물네 살의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대니)가 나누는 대화는 사랑을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전하는 것도 수락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들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고 회억하는 것도 아니다. ‘~이다’가 아닌 ‘~이 아니다’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세계. 그것이 사랑의 문법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해본 이라면 도리없이 아프게 안다. ‘사랑할 수 없음’으로만 사랑해야 하는 이 소설 속의 사랑을 그저 ‘사랑’이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다. 애틋함도, 절망도, 안타까움도, 부족하다. 그런 말들은 비좁고 버성긴다. 해결하고 싶고 풀고 싶고, 그게 불가능하면 만들어서라도 말하고 싶다. 미지의 생명이 이곳에 도착하는 일이 그와 같은 것이지 않을까, 어떤 어휘가 개창하는 일이 그와 같은 것이지 않을까. ‘두근거림’과 ‘초조함’은 생명의 정동이지 않을까.

인용문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말하는 게임’의 일부분이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사라지고 있어 애틋한 세계이며, 사라져버려 슬픈 세계다. 그러나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인 세계이며 말할 수 있어 전해질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배울 수 있고 감응할 수 있다. 그곳엔 ‘아이’가 있고 (집을 나가버리긴 했지만) ‘고양이’도 있다. 그리고 노인이 있다. 소리 내어 울고 있다고 해도, ‘노인이 소리내어 울 수 있는 세계’는 마냥 나쁜 곳만은 아닐 것이다. 또 괄호 속에 누군가가 (배우고) 있다.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이, 배워서라도 가까워지려는 이, 훔쳐서라도 도우려는 이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괄호-기계 속에서만 함께 있을 수 있다. 사랑할 수 없음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AI의 운명만이 아니다. 가능이 아닌 불가능의 삶을 살아야 하는 노인 또한 그러하며 끝없이 침몰하고 있는 이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니 저 괄호는 AI의 것이 아니다. 노인의 것만도 아니다. 이 세상의 것이다. 비약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괄호, 불가능의 형식은 이곳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이곳을 감싸고 있는 이 세상 그 자체다. 이 세상이라는 괄호-불가능성 속에 우리는 같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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