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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연구자와 전령

by 종업원 2016. 4. 6.

2016. 4. 6




"코뮌 간 접촉은 '필요하다'기보다는 '원하게 된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코뮌도 코뮌적인 운동도 생로병사를 겪기 때문이다. 병이 든 순간에 다른 코뮌과 접촉하는 것은 '이쪽'의 무거움을 덜어 주고 숨 쉴 구멍을 마련해준다. 또한 '저쪽'을 통해 '이쪽'의 폐쇄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하기도 하며 고립감에서 벗어날 출구가 되기도 한다."

―신지영, 「프롤로그: '이후'와 '계속' 사이에서」, 『마이너리티 코뮌』, 갈무리, 2016, 16~17쪽.


"소문의 확산은 정치적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비겁함을 극복하고 이야기를 증언하고 퍼뜨려 갈 수 있다면 어떨까? 심화하고 있는 전 세계의 인종주의와 파시즘화 속에서 나는, 여러 가지 갈래로 겹쳐지는 길에 대한 경험을 담은 일지형식의 기록이, 비겁함을 넘어서고 세상의 비밀들을 비밀스럽게 누설함으로써 우리가 서로 연루되어 있음을 선언하는 소문이 되길 계속해서 바란다. 나는 이러한 소문의 증언자/조작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될 때, 코뮌적 순간들을 글로 씀으로써 나 자신의 것이나 개인의 것으로 소유해 버릴지 모른다는 위험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24쪽.


'어떤 코뮌도 코뮌적인 운동도 생로병사를 겪는다'는 문장은 너무 단순하게 명징해서 놀랍다. 대안적인 모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필사의 노력, 그 눈물겨운 '고군분투'는 내부의 가치를 지켜내고 키우는 것에 계류될 때 썩거나 파멸하고 만다. 응답은 내부로부터 들려오지 않는다. 저마다 분투하고 있기 때문에 요청의 내용도, 응답의 내용도 달라  어긋나기 일쑤다. '병이 든 순간에 다른 코뮌과 접촉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몸으로 쓴 것임을 아프게 알겠다. 코뮌이 병이 든다는 것을 인지/인정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 사실을 수락하고도 다른 코뮌과 접촉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신지영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쓰고 있는 '이쪽'과 '저쪽'이라는 지시대명사는 안전한 자리에서 쉽게 어느 쪽을 '지시' 하는 말이 아니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몸을 끄-을-고' 넘어 갔다가 기꺼이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다른 모습으로) 넘어 온 이만이 쓸 수 있는 말이다. '이쪽'과 '저쪽' 모두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앞질러 '너머'를 말하지 않고 끝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고, 다시 알고 있던 곳으로 돌아와 그 앎을 다시 지우는 걸음으로 '저쪽'에서 '이쪽'을 향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이쪽과 저쪽으로 몸을 끄-을-고 옮겨다닌 이력 속에서 신지영은 '연구자'라는 자의식, 아니 '쓰는 이'라는 자의식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듯하다. 내려놓았다고 했지만 이는 인식의 전환이 아닌 몸의 변화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연마함으로써 닳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신지영에게 쓰는 행위란 '연구-연구자'가 아닌 '전하고 확산하는-전령'이라는 다른 의미망 속의 운동이다. '쓰는 행위'가 '소유권이라는 오염' 상태로 기울 수 있음을 매번 자각하며 지속하는 이는 드물다. 더군다나 그곳이 '각자도생'이라는 문법만이 통용되는 연구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글을 '잡문'이나(물론 이 말은 지나친 겸손이나 폄훼라기보단 서구적 글쓰기 전통이 아닌 동아시아적 전통 아래에 있는 글쓰기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일지형식의 기록'의 자리에 놓아둠으로써 소문처럼 확산되는 것을 쓰는 행위의 희망으로 품을 수 있다는 것은 드물고 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