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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임솔아, 빨간

by 종업원 2017. 10. 3.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

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먹고 싶다

는 말을 들었다.


*


목소리는 어디까지 퍼져나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졌다 고통에 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는(창문을 열어줘) 저것을 나는 고통의 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피가 빨갛다는 말을 믿고 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오를 때처럼 점점 눈이 부시다


살인자에게서도 기도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나의 한 줄 일기와

당신들이 자살하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 사이를 헤맬 것이다.


*


이곳으로 가면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어야 한다

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발가벗은 채 발목을 잡히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매를 맞고

처음으로 울어야만 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말해지는 동안

믿어본 적 없는 소원이 이루어진다.


고통을 축하합니다.

빨간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른다.


―임솔아, 「빨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