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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산책 없이

by 종업원 2017. 8. 19.

2017. 8. 12



해질녘 몰운대를 걸었다. 처음 걷는 길 위에서 힘없이 사라지는 발자국 소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던 잘못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 . 모르는 길을 바장이며 조은의 시집을 읽었다. 시는 잘 읽히지 않았고 걸음도 잘 되지 않았다. 손쓰기엔 늦어버린 통지서를 받은 사람 마냥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한번도 산책을 하지 않은 생활을 헤아려보았다.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형체 없이 사라져버리는 애틋한 것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고 그 무엇도 키우지 못했다.


몰운대 전망대 쪽으로 가지 않고 귀퉁이를 향해 걸었다. 초식동물처럼 두리번거리며 복숭아 하나를 달게 먹었다. 파도를 코앞에 두고 앉아 바람에 맞서 날개짓하며 허공에 멈춰 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낚는 물고기들은 크기가 작았지만 그것들을 손질하는 손놀림은 빈틈이 없었다. 간만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마음껏 쐬지 못했다.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산책 없이 지낸 생활들, 생각 속에서 바스라져버린 기획들, 한 문장도 쓰지 못한 글들.


일상적인 비참과 섬광 같은 서러움을 평범한 어휘들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인 조은의 생활력에 이끌렸다. 가난하고 누추한 집과 어둡고 헐벗은 골목,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는 도시의 이곳 저곳을 걸으며 화자는 자주 절망하고 가끔 용서했다. 바라보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다. 매만지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다. 걷지 않으면 섬광 같은 순간도 없다. 막 아프기 시작한 사람처럼 비척거리며 조은의 시를 읽었다. 기억나는 구절 하나 없지만 이해가지 않아도 간직해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르고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음을 잠깐동안 기억해보았다. 지나왔던 시절에 드물게 남은 밑줄들 또한 대개 그렇게 그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것들을 의심하고 심문하는 행위는 무엇도 좋아하지 않으려는 의도와는 무관했지만 단단하지 못한 생활은 의지를 쉽게 쓰러뜨리고 의도를 비웃으며 비켜간다. 진심으로, 제대로 좋아하고자 하는 의도가 혹여나 앎에 대한 욕망에 침윤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활의 문지기처럼 서 있던 의심과 심문이라는 날선 긴장이 앎에 대한 소유욕을 감추기 위한 자기기만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 걸으며 ‘모르면서 좋아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되뇌였다. 알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도 좋아할 수 있는 생활의 상태를  어떻게 희망할까. 어두워져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시집을 움켜쥐고 모르는 길을 더듬으며 더 머물 수 없는 몰운대를 비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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