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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하지 않음의 생산성

by 종업원 2017. 1. 14.

2017. 1. 14



독신 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사치는 자유롭게 이것 저것을 해보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무언가를 중단해보는 일에 있다. ‘1인 가정’이라는 삶의 형식이 여전히 사회 속에서 버성기는 형편 속에서 독신 생활이라는 것 또한 매순간 귀찮음과 싸워야 하고 하찮음의 힐난을 견뎌야 한다. 귀찮음과 하찮음의 협공을 견뎌낸 성과란 마침내 무언가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부터 오는 성취감에 있지 않다. 자유로움의 참맛은 무언가를 하는 데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지 않는 데 있기 때문이다. 


8년 간 이어지고 있는 나의 독신 생활을 헤아려보아도 기억할만한 성취는 마침내 무언가를 중단했던 순간에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조차 또 다른 무언가를 중단할 때만 가능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집에서 요리를 하되 맛있는 요리가 아니라 고기를 쓰지 않는 요리, 기름을 두르지 않는 요리, 음식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요리를 해보는 것이다. 6개월정도 일식(一日一食)을 해보고 또 그 정도의 기간동안 채식도 해보았다. 지리한 채질식을 하면서 미세하게 일어나는 몸의 변화도 희미하게나마 감지해보기도 했다. 이 식습관은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먹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야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먹고 자고 싸는 행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내 생활의 패턴이 어떤 습관에 침윤되어 있는지, 또 어떠한 동력으로 운신하고 있는지를 헤아려보기도 했다. 


생활의 패턴을 인지하는 일은 세심한 주의와 끈기의 노동이 필요하다. ‘생활’이란 언제라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것’속에 흐르고 있는 드문 의욕과 갖은 습벽을 분별해보는 일, 솎아내는 일, 잘라내고 키우는 일. 내게 생활을 돌보는 일이란 언제라도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것들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시작’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고 ‘시작’에만 머무를 때가 잦다. 말하자면 생활 밖에 없는 생활. 생활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생활. 2014년 9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송도 시절의 많은 날들이 생활 밖에 없었던 것은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관계의 상흔과 속절없이 마모되었던 생의 의욕을 스스로의 힘으로 일으켜 세워 어떻게든 회복해보려 안간힘을 쓰는 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이지만 누구의 말도 아닌 내가 한 말에 내가 감쪽 같이 속아버리듯 생활이라는 삶의 근본을 되살리려는 애씀이 생활을 탐닉하고 안주하는 ‘부지런한 게으름’이라는 기묘한 상태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활이라는 유배지. 송도의 해변을 거닐고 암남공원 곳곳을 걸어다닐 때 더할나위 없이 평온했지만 그때 나는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끝없이 도망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쓰러지거나 뒷걸음질 치기 싫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은퇴한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내 감정을 말갛게 씻어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눈을 감았지만 끝내 잠들지 못하고 감은 눈으로 생활을 더듬어 갔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더뎠지만 끝내 무뎌지지는 못했던 시간. 그렇게 한 시절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한심함과 안타까운 심경으로 회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몇년전부터 나는 ‘생활 비평’이라는 걸 내심 부지런히 써왔는데, 그것이 유배지에서의 글쓰기와 닮아 있음을 인지하고서는 몇달간 의식적으로 생활글 쓰기를 중단했었다. 생활 밖에 없는 생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 생활을 세심하게 들어다보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면서, 쓰지 않으면 볼 수 없었던 생활의 결과 마주할 때만 느낄 수 있는 내밀한 충족감을 포기한 셈이다. 하지 않음으로부터 돋아나는 의도없는 생산성을 내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새벽에 깨어 차를 우려내 마시며 이제는 이런 염려를 하지 않고도 문장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말에 나온 첫번째 책을 준비하면서 그 글들이 죄다 당시 만났던 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었다. 여전히 곁에 있는 사람을 멀찌감치 밀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며, 또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자리에 가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조금 더 쓰고 싶다는 의욕이 작지만 단단한 모습으로 내 생활의 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눈을 뜨자마자 쓰고 싶다. 눈을 감고도 써내려가고 싶다. 생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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