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TV 쇼’의 미디어 장악은 객관적인 실제에 대한 신념의 상실을 반영하는 당대의 문화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반인과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엿봄으로써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중문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날 것 그대로를 여과 장치 없이 노출 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표면적인 특징과 달리 ‘리얼리티 TV 쇼’는 역설적으로 불확실한 사건을 제어하는 데 집중한다. ‘리얼리티 TV 쇼’는 ‘위험’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지만 사건을 예측하고 제어함으로써 불안을 제거한다. 바꿔 말해 ‘리얼리티 TV 쇼’는 관객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다만 위험이 주는 쾌락을 선사할 뿐이다. 올리비에 라작의 주장처럼 ‘리얼리티 TV 쇼’는 낯선 것을 설명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삶에서 ‘힘과 위험들’을 내몬다. 이뿐만 아니라 ‘리얼리티 TV 쇼’는 모든 진짜 이질성을 선험적으로 소화하는 사회적 관계를 칭송하며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동화시킴으로써 ‘무겁고 두려운 물질성’을 회피한다. 그것은 우연 없고, 구멍 없고, 바깥도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티 TV 쇼’의 유행은 비단 특정한 형식의 TV 프로그램 범람으로 국한될 수 없다. ‘리얼리티’라는 가치의 확장은 구성원의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감시·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역할 또한 수행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데 조금의 거리낌이 없는 세대들이 ‘리얼리티 TV 쇼’류의 각종 미디어의 주요 소비자층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단지 특정 세대의 문화 정체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공개해야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아울러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리얼리티 TV 쇼’ 프로그램의 특성은 당대 구성원들의 심성구조를 주관하는 중요한 기제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매회 탈락자들 배출하면서 프로그램의 흥미를 더해가는 ‘리얼리티 TV 쇼’처럼 언제라도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내면화하는 것은 삶 속에 언제나 추방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 정신’이야말로 ‘생존’이 화두가 된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구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이 리얼리티 TV 쇼에 열광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에 골몰하고 있는 이 프로들이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실제적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TV 쇼에서 우리가 사유해야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은 삶의 모든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카메라’가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여준다는 확고한 믿음에 있다. 이를 관점(perspective)의 일방향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으며 카메라에 투사하는 절대적인 믿음이야말로 관점의 폭력성을 주관하는 핵심적인 기제라고 할 수 있겠다. 카메라가 전달하는 정보들이 사건을 투명하게 담아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사실’이자 ‘진실한 것’이라는 믿음을 구축하는 신화야말로 특정 관점을 맹신하는 일방적 인식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리얼리티 TV 쇼’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분리할 없음을 의미한다. ‘리얼리티 TV 쇼’는 관음증이나 노출증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원들이 맺는 새로운 관계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실이자 극장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각체계가 구성되는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TV 쇼’는 본다는 것의 지위를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는 행위’를 근간으로 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미디어의 범람은 ‘리얼리티 TV 쇼’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 속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관점의 일방향성을 보다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 ‘1인칭 시점’이라는 특정한 양식이 미디어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리얼리티 TV 쇼’가 ‘리얼’이라는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을 강구하는 데 반해 삶과 죽음의 각축장인 전장(戰場)이 외려 게임처럼 비현실적이고 리얼하지 않은 현장으로 바뀌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7월 12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두 명의 아이가 미군 헬기에서 쏜 기관포에 맞아 쓰러졌다. 아파치 헬기 조종사는 무전으로 태연하게 말을 한다. “이라크 경찰들이 병원으로 데리고 가겠지.”, “전쟁터에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이 잘못이야.” 이날 <로이터> 통신원을 비롯한 12명의 민간인이 미군 아파치 헬기가 쏜 기관포에 의해 사망했다. 미군이 <로이터> 통신원이 들고 있던 망원렌즈를 소총으로 오인했다고는 하지만 폭격을 당한 이들이 그 어떤 대항 사격도 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수습하려는 구조원들에게까지 폭격을 가했다는 점은 이 사건이 오인으로 비롯된 ‘사고’가 아닌 일상적으로 수행된 ‘군사작전’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헬기에 장착된 카메라가 제공하는 십자과녁에 포착되는 모든 피사체는 잠정적인 적으로 설정된다.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는 민간인 폭격과 같은 문제는 미군의 잔혹함이나 작전 수행의 미숙함과 같은 요인에서 비롯되는 우발적인 사태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십자과녁을 제공하는 ‘프레임(frame)의 규정력’과 폭력 수행의 상관성이라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프레임은 시각 매체가 제공하는, 대상을 포착하는 물리적 범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헬기 조종사에게 제공되는 ‘프레임’은 일정한 조건 속에서 구성되는 구조이자 체제라고 바꿔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과 아군의 구별, 제거해야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의 판단여부는 ‘프레임의 규정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일상과 전장이 분리되지 않는 현실의 구조, 이에 따른 지각의 변화, 그리고 전장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각 구조를 규정하는 테크놀로지의 작동 방식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첨단 테크놀로지의 의해 생산된 이미지로 대체된 이러한 상황은 비단 전쟁이라는 예외상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전(現代戰)의 경우 병사는 자신의 눈보다는 전투 수행에 최적화되어 있는 첨단 기계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전장에서의 지각의 작동 방식이 일상적인 시각체계와 어느 정도의 합치가 이루어졌던 과거의 전쟁과 현대전이 전혀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각 능력이 전적으로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정보로 대체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전쟁무기가 비약적으로 발달함에도 오폭 등의 오인 및 오류의 수치가 줄지 않는 것은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판단 능력을 테크놀로지에 양도한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정은 마치 인종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적과 아군의 경계가 특정한 조건에 의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음을 환기시킨다.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한 미군 헬기 조종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 거리를 배회하는 성인 유색인종들은 죄다 제거해야할 적인 셈이다. 그들은 1인칭 슈팅 게임에서 쉼 없이 출현하는 떼거리(mob)와 다르지 않다. ‘몹’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프레임’ 속으로 침입한다. 이때 전장의 감시와 통제는 항공사진과 감시카메라, 폐쇄회로가 제공하는 이미지에 의해 이루어지며 심지어 실제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조차 병사의 눈은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전장은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특정한 프레임에 의해 구축되어 있는 셈이다.
1인칭 슈팅 게임은 이러한 변화된 지각 체계를 설명하는 데 많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우선 1인칭 슈팅 게임이 3인칭 시점의 게임에서와 같은 상황을 조망하는 눈을 갖지 못한 채 특정한 주관적 시점만을 채택함으로써 폐쇄된 상태의 정보만을 제공한다는 점을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물론 게임 전체 상황을 조망할 수 있는 시각적 인디케이터, 즉 HUD(Head Up Dispaly)와 다양한 형식의 정보창이라는 게임 내적인 인터페이스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1인칭 슈팅 게임은 게임의 몰입감이나 긴장감을 높이는 1인칭 시점이 주관하고 있는 체제라고 해도 무방하다.***** 도처에서 출현하는 몹(mob)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프레임이 진동하거나 화면에 스크래치가 발생하는데, 이는 단순히 외부로부터 받은 공격을 외화하는 효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흔들림과 스크래치는 프레임이라는 체제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다. 게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프레임을 위협하는 몹의 공격을 먼저 제압해야 한다. 프레임에 ‘침입’하는 모든 형체에 총격을 가해 제거함으로써 프레임을 유지시켜야 한다. 프레임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피사체를 적으로 간주하는 1인칭 슈팅 게임은 단순히 게임의 형식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미군의 민간인 폭격 영상을 다시금 환기해볼 때 1인칭 슈팅 게임의 형식은 전지구적 내전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개별자들의 지각 체계를 정확히 현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리비에 라작, 백선희 옮김, <<텔레비전과 동물원>>, 마음산책, 2007, 174쪽.
**리얼리티 TV 쇼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심성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와 분석은 필자의 「추방과 생존―리얼리티 TV 쇼와 지워진 얼굴」(≪크리티카≫ 4집, 올, 2010)을 참조하기 바란다. 논의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리얼리티 TV 쇼의 구체적인 사례분석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장병원, 「눈 먼 전쟁-기계의 탄생」, ≪시네 21≫ 715호, 2010.
****1인칭 슈팅 게임의 시작은 <메이즈 워 Maze War>(1973)나 <스패심 Spasim>(1974)이 개발된 197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 <울펜슈타인 3D Wolfenstein 3D>(1992)와 <둠 Doom>(1993)이 출시되고 나서이다. 이후 <퀘이크 Quake>(1996), <언리언 Unreal>(1998)을 거쳐 현대전 개념을 도입한 <하프라이프 Half-Life>, <소콤 Socom>, <헤일로 Halo>로 이어지며 게이머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 냈으며 현재는 <스페샬 포스 Special Force>, <워록 War Rock>, <서든어택 Sudden Attack> 등이 꾸준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1인칭 슈팅 게임의 활성화를 단순히 게임 산업의 발전으로만 간주할 것이 아니라 냉전체제 붕괴 이후 전쟁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전지구적 내전 상황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인칭 슈팅 게임과 시각적 요소의 변환에 대해서는 전경란, 「3D 1인칭 슈팅 게임에서의 시각적 요소와 주체」(≪한국게임학회≫ 10권 3호, 2010)를 참조.
<아직 소화되지 않은 피사체를 향해 쏘아라―1인칭 Shot, 리얼리티 쇼와 전장의 스펙터클>부분 <<작가세계>> 2010년 가을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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