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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비용 : 지우는 글쓰기와 장르 문법

by 종업원 2011. 8. 27.



 


“나는 달로 간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한유주, 「달로」, <<
달로>>, 문학과지성사, 2006, 8쪽)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그런 문장을 첫 번째 소설집의 첫 번째 문장으로 기입했어야만 한 소설가가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세계의 뒷면’, 다시 말해 ‘말의 뒷면’을 검질기게 파고들었다. 한유주의 소설이 언제나 죽음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은 그가 놓여 있는 세계의 한켠이 죽음에 반쯤 잠겨 있거나 그의 글이 한쪽 발을 죽음 강에 담그고 있을 때만 씌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세계의 뒷면에 가닿으려고 하는 것은 세계의 앞면은 이미 붕괴해버렸거나(“겉장이 달아나고 없는 세계”, 「죽음의 푸가」, <<달로>>, 44쪽) 극심하게 오염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유주는 이러한 세계에서 쓴다는 것은 그 무엇도 구원하지 못하며 외려 또 다른 ‘야만’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한다.

 

우리의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야.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세대지. 우리의 과거는 전파로 얼룩져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반성도 회의도 추억도 갖지 못한다. 텔레비전의 화면은 한 가지 전파만을 송신하고, 그마저도 뒷면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에게는 영혼이 없다. 오직 전파만이 영혼의 속도로 직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야만이다.
 
—「그리고 음악」, <<달로>>, 118쪽


 

“세계는 14인치 텔레비전 화면 하나로 축소”되어 있기에 “흑과 백으로 명멸하는 세계는 나를 어두운 방 한구석으로 밀어낼 뿐”(99쪽)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세대에게 남겨진 것이란 ‘수사학’ 밖에는 없으니 그것을 부려 세계를 재현하는 것은 전파로 얼룩진 세계에 또 하나의 얼룩을 덧입히는 것일 뿐이리라. 세계가 감각의 너머에 있다는 것, 사건이 (미디어에 의해) 너무 일찍 도착해버려 감각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정확하게 ‘경험’을 가지지 못한 세대의 ‘새로운 빈곤’을 가리킨다. 한유주가 ‘쓰고 있는’ 말줄임표나 부정문으로 이루어진 소설, 바로 쓰지 않음을 쓰는 글쓰기, 다시 말해 지우면서 쓰는 글쓰기는 글쓰기가 또 다른 야만이 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작가가 서 있는 위치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소설은 언제나 세계가 부러진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글쓰기의 영도(零度)에 가닿으려는 한유주의 도약이 종종 ‘자기유폐적인 옹알이’로 오인되곤 하지만 그것은 모국어를 부린다는 것이 매번 ‘치욕’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작가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지 않을까. 부러진 세계를 부러진 언어로, 절룩거리며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 언제나 치욕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터이다.

 



누군가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들의 야만적인 시대를 지금 다시 본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야만적이지 않다. 나는 자꾸만 살아남는다. 그것이 나의 삶을 위협한다.

살아남음으로써 깨닫게 되는 감정은 다름 아닌 수치스러움이다. 그 수치스러운 감정이 계속해서 깨어 있게 한다. 치욕과 망각으로 점철된 삶.
 
—「그리고 음악」 114쪽.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하는 대신 무릎으로 기어 먼 길을 갔다 그리고 다시 안개는 사람들의 살빛으로 빛났고 썩은 전봇대에 푸른 싹이 돋았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그때부터 사람이 사람을 만나 개울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시 안개는 사람들을 안방으로 몰아넣었다 소곤소곤 그들은 이야기했다 입을 벌릴 때마다 허연 거품이 입술을 적시고 다시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마주보지 말아야 했다 서로의 눈길이 서로를 밀어 안개 속에 가라앉혔다 이따금 汽笛이 울리고 방바닥이 떠올랐다

아, 이곳에 오래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이성복,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전문,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1980년대, 이성복을 괴롭게 한(달리 말해 시를 쓰게 한) ‘치욕’과 한유주의 ‘치욕’을 비교해보자. ‘안개’가 “입에 담지 못할 일”을 은폐하지만, 사람의 (개)울음까지는 막지 못한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골방에 감금되지만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이것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이에 반해 한유주의 ‘치욕’은 실어증을 낳는다. 한유주도 외친다. ‘저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고. 저 너머에, 강 건너에, 지구 반대편에 매순간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사건은 각종 미디어에 생생하게 담겨 실시간으로 매일 아침 문앞에 당도해 있다.*
그럼에도 야만으로 점철된 지금의 세계에는 “무릎으로 기어 먼 길을” 가거나 “서로의 눈길이 서로를 밀어 안개 속에 가라앉”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은 너무나 평온하다. 외려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와 ‘이해’가 넘쳐난다. ‘저 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사실이 외려 그/녀를 불안에 떨게 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발화가 ‘침묵’이라고 할 때, 한유주의 글쓰기는 이야기를 불려가는 ‘서사’의 구축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제 몸을 불려가는 이야기는 마치 쉼없이 비대해지는 도시의 형상과 비슷해보이지 않는가. 모든 뼈가 분절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단어들이, 문장들이 제각각 떨어져 발아래에서 서걱거리고 있는 것처럼, 한유주의 글쓰기는 유연한 ‘봉합’이 아닌 그 분절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마치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행위를 가능케 하는 모든 뼈가 실은 부서져 있는 상태라는 듯 그의 문장은, 이야기는, 덜그럭 거리며 짐짓 자연스러운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껏 일그러져 있는 말의, 관계의 이음매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붕괴된 세계의 잔해 더미에서 문장을 지우는 글쓰기의 양식을 고안해내고 있는 한유주에게서 최근 세계의 종언, 묵시록적 세계관을 주조음으로 하고 있는 <<
더블>>(창비, 2010)을 펴낸 박민규로 비약해보자. 박민규의 「카스테라」가 골방에서―정확하게는 냉장고 속에서―“하나의 세계”를 발견한 것과 달리**
<<더블>>은 세계의 종언을 축으로 회전하는 인류의 마지막 운동을 통해 구축한 세계처럼 보인다. 자연스레 코멕 매카시의 <<로드>>(문학동네, 2008)을 떠올리게 하는 「루시」나 지구의 바닥에 닿기 위해 ‘디퍼’라는 새로운 종의 인류를 다룬 「깊」과 같은 작품을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박민규의 <<더블>>을 이루고 있는 다채로운 소설들의 근저에 묵시록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에 대해 집중해보자.


우선 ‘생존’을 위해 지구가 아닌 화성까지 가서 세일즈를 해야 하는 한 가장의 모습을 물과 공기가 부족한 화성이라는 행성의 정조로 스산하게 묘사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의 경우. 빈곤하고 발기가 되지 않는, 아니 빈곤하기에 발기가 되지 않는 세일즈맨, 바꿔 말해 “최후의 보루조차 사라진 인간”(183쪽)은 화성이라는 행성에서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지구에서는 “좋은 시절은 지나갔다”(179쪽)는 문장을 빼고서 시작하는 삶을 기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과거의 영광을 가능케 했던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 수 있던 세일즈를 하는 수완과 능력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외려 의사(pseudo) 남근인 ‘딜도’의 역할로 대체됨으로써만 ‘의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해 ‘딜도’라는 의사 남근에 의해서만 ‘가정’을 사수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가까스로 지켜낸 세계에 ‘피로’와 ‘빈곤’만이 오롯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피로’과 ‘빈곤’으로 점철된 삶의 자리는 “대의와 명분이 살아 있던 시대였으니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龍龍龍龍」, 88쪽)는 문장과 맥을 함께 하며 “영웅의 시대는 끝이 났다. 바야흐로, 소녀들의 시대였다.”(94쪽)라는 박민규다운 어법으로 변주되고 있다.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인류가 골방의 냉장고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한 조각의 카스테라’와 조우했던 것처럼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세계에 그 누구도 나서서 대적할 마음이 생기는 않는 ‘생존’이라는 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인걸은 간 데 없고 가난과 싸워온 반세기였다. 무학의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와 칩거, 막노동이 전부였다. 무공을 겨룰 상대도 비급을 시전할 대상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법이 정의를 대신하고 금전이 힘을 대신하는 세상이었다. 용을 믿는 세계도, 용이 필요한 세계도 아니었다. 세계는 이미 무목(無目) 무각(無覺)으로 무리지어 이동하는 작고 소소한 개미들의 것이었다. ···(중략)···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세계에는 연명(延命)만이 남아 있었다.
―박민규, 「龍龍龍龍」, <<더블 side b>>, 창비, 2010, 90쪽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세계에는 연명(延命)만이 남아 있었다.”는 저 문장이야말로 <<
더블>>이라는 세계를 정초하고 있는 머릿돌이라 하겠다. 사정이 이러할 때, 오늘날의 상황을 무협소설이라는 장르적인 어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위의 소설은 대의명분이 사라진 시대의 서사의 운명을 적실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르적인 문법’이 아니고서는 ‘서사’를 구축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는 현실의 문맥을 얼핏 현시하고 있다는 것.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도사들이 세속의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비단 생활고 때문만은 아니다. ‘도술’이란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릴 수 있는 환경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질서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의와 명분이라 바꿔 말해도 좋다.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시대에 ‘생존’이라는 괴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서사를 구축할 수 없는 시대에 세계의 뒷면을 검질기게 파고드는, 쓰면서 지우는 글쓰기와 장르 문법이 마주하고 있다. 그것을 오늘날의 작가들이 지불해야할 ‘생존의 비용’, 혹은 ‘글쓰기의 비용’이라 불러도 좋을까.



* “2001년 9월 11일······, 우리는 새로운 광경을 목도한다. 미디어란 얼마나 재빠른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첫 번째 빌딩이 무너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두 번째 빌딩이 무너지기도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또 곪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카메라는 이미 그곳에 당도해 있다. 장면은 0과 1로 전환되어 잠시 대기권 밖을 떠돌다가, 곧바로 세계 곳곳의 안테나로 흡수된다. 전광판, 텔레비전, 갑작스런 호외. 우리의 세대는 너무나 공시적이다. 고통을 느끼기 위한 순간의 여유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중략)··· 장면은 간결하고, 아무런 부연도 하지 않는다. 장면은 감각 너머에 있다. 그것이 우리의 야만이다.” 한유주, 「그리고 음악」, 118~119쪽


** 골방에서 발견한 세계에 관해서는 졸고, 「종언 이후의 시공간과 주체성―수용소와 골방의 동물들」(<<작가들>>, 2009 가을호)을 참조.



-<생존의 비용, 글쓰기의 비용-우리 시대의 '작가'에 관하여> 부분, <<작가와비평>> 13호,(2011년 상반기)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