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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문학의 곳간 41회 <무한한 하나>(산지니, 2016)

by 종업원 2017. 11. 18.







바로 그 한 사람

-서문을 대신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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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비평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애씀의 노동이다. 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만나는 일, 한 사람을 결정적으로 만나는 일, 침잠과 고착의 위험함을 무릅쓰고 ‘바로 그 한 사람’으로 만나는 일.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무한하게 만나기 위한 시도로써의 글쓰기. ‘무한하다는 것’은 특정한 대상이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자질을 지칭한다기보다 모든 ‘하나’가 공평하게 나눠 가지고 있는 속성을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중요한 건 특별한 능력이나 자질이 아니라 모든 하나(존재)에 깃들어 있는 잠재성에 있다. 아무 것도 아닌 하나가 누군가에게 ‘바로 그 하나’이자 ‘절대적인 하나’가 될 때 ‘무한’이라는 끝이 없는 공간이 열린다. ‘바로 그 하나’란 사랑의 언어이며 ‘무한함’은 추상적이고 미지의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평등한 공동체의 장소를 의미 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발견한 ‘바로 그 하나’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록한 오랜 이력의 총체다. 내가 읽은 작품들을 ‘바로 그 하나’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을 비평의 시작이자 목표로 삼아 왔고, 세상의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는 잠재성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몫이라 생각 해왔다. 네그리(Antonio Negri)는 ‘고유하고 사적인 것을 공동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열쇠’를 ‘사랑’에서 찾았다. 사랑에 대한 유물론적 정의가 공동체에 대한 정의와 같은 것이라는 그의 말에 따른다면 모든 존재 속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힘’을 ‘바로 그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내는 행위 또한 공동체를 상상하고 희망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지배와 독점을 근간으로 하는 ‘군림하는 하나’가 아닌 미미하지만 평등한 이들의 이름인 ‘무한한 하나’엔 몫이 없는 이들이 서로를 부르고 기록했던 이력이 쟁여져 있다.



2

문학 비평을 쓴다는 것이 아무도 없는 트랙(track)을 달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나는 종종 생각 했다. 왜 지금보다 더 부지런하지 못할까, 나는 왜 더 빨리 달리지 못하는 걸까. 누군가를 앞지르기 위한 질책이 아니었다. 이 트랙을 달리고 있을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짐작하지 못했음에도 맹목적으로 읽고 쓸 수 있었던 것은 조금만 더 부지런히 달린다면 이 트랙의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내 희망의 최대치였다. 알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트랙 위를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 이라면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텅 빈 트랙 위를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차라리 ‘알 수 없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좋다. 


비평을 쓰면 쓸수록 내가 사는 이곳이 개미지옥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더 선명해졌다. 학연과 지연으로 촘촘하게 얽혀 있어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세계에서, 우애와 연대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준다지만 위계화되어 있는 그 힘이 언제라도 서로를 옭아매는 ‘개미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고 위계적인 힘이 느슨한 곳에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게 서로의 발목을 잡아 밑으로 끌어내리는 ‘물귀신적인 것'과 싸워야 했다. 그때 비평은 자유롭게 숨쉬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필드(field)였다. 그저 부지런히 달리는 것으로 텅 빈 운동장을 경기장으로 바꿀 순 없었지만 무언가를 읽고 쓰는 일을 지속하는 것은, 다시 말해 내 힘으로 트랙을 달리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고도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억압적인 ‘우리’가 아닌 자유로운 ‘타인’으로 만날 수 있는 단 한 명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곳을 살아내기 위해 알 수 없는 이의 뒷모습을 향해 달렸고, 내가 알고 있던 이들을 낯선 자리에서 생소하게 만나기 위해 더 달렸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은 그 애씀의 주행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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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1부는 희미하고 연약한 존재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깊이와 무게를 더해가는 고투의 이력을 탐색한 글들로 묶었다. 자신의 몫을 가져보지 못한 주변부적 존재들이 외려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를 보살피며, 또 누군가를 살려낸 어울림의 역사를 탐색하는동안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할 수 있었다. 2부는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담은 글들로 묶었다. 모든 말의 잠정적인 접두어이지만 ‘버려야 접합해지는’ 개념이기도 한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내 글쓰기의 오랜 화두다.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고통의 공동체>는 처음으로 청탁 받아 쓴 원고인데 몇년 후에 쓴 <불가능한 공동체>와의 거리가 자못 아득하다. 3부는 여러 시인들의 시적 세계를 뒤쫓은 글들이다. 매번 해석자의 의도를 비켜갔고 의미를 낚아채려는 욕망이 클수록 헛손질도 커져 황망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실패의 이력 속에서 뜻하지 않게 시적 존재의 평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4부에 수록되어 있는 글들은 ‘지역적인 것’에 관한 고민의 이력이다. 늘 어떤 위치에서 글을 쓰고 있는가를 자문해야 했던 형편 탓에 ‘비평을 한다는 것’이 ‘지역’을 사유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어떤 글은 무모하리만치 야심차고 어떤 글은 비애로 가득 차 있다. 지역적인 것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만큼은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고민이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지역적인 것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한 생산적인 탐구는 계속되어야겠지만 그것만큼이나 ‘지역’을 자의적인 방식으로 전유하고 탈취하는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5부는 서평 형식의 글들로 묶었다. 등단하고 오랫동안 서평 원고 청탁이 많이 들어왔던 탓에 글의 분량이 상당했지만 책으로 묶어내는 과정 중에 상당부분을 덜어낸 탓에 조금은 가벼운 모양새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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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열람실과 연구실을 전전하며 글을 써왔다. 좁은 공간에 틀어박혀 밤을 새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무엇보다 글을 써야 한다고, 니가 쓴 글을 읽고 싶다고, 이후엔 또 어떤 글을 쓸 것이냐고 말을 건네고, 묻고, 논쟁해준 분들이 있었기에 반복되는 열패감 속에서도 꾸준히 읽고 쓸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고민은 줄곧 해왔지만 ‘글을 쓰면서 사는 삶’이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삶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지평이 있다는 것을 깨치는 데엔 권명아 선생님과의 만남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배움과 깨침이 누군가의 도움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해방된 힘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끝없이 이어졌던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체득할 수 있었다. 선생-선배-동료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언제 어디서라도 대화를 이어주신 그 모습은 비평가/연구자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삶의 영감으로 깊이 자리 하고 있다. 등단한 이후 평론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가장 먼저 내어주시고 특별할 것없는 능력을 예민하고 사려깊은 시선으로 보듬어 오랫동안 신뢰해주신 구모룡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지역’에서 비평을 한다는 것의 많은 의미를 선생님의 연구와 활동을 통해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연필처럼 지워지기 쉬운 사람들의 깊이와 무게가 되어보는 일.’ 등단 당선 소감에 적었던 이 말은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았던 책의 한 귀퉁이게 적혀 있던 글귀였다. 오랫동안 그 글귀가 건네 준 희망으로 읽고 썼었다. 처음부터 ‘한 사람’이 되어주신 김만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산지니 출판사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원고를 다시 읽고 부단히 고치면서 ‘책’이라는 형식이 없었다면 결코 생각해볼 수 없었을 값진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은 온전히 산지니 출판사에 빚지고 있다. 그 빚을 오랫동안 갚아가고 싶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애써주신 강수걸 사장님과 권경옥 편집장 님, 윤은미 편집자 님께 감사드린다. 



2016년 11월 가을

부산 장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