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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등을 내어주는 업기"

by 종업원 2017. 12. 3.

2017. 12. 3





1. 지난 주 토요일, 작년 이맘 때쯤에 출간되었던 저의 첫번째 평론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대개의 문학 평론집이 비슷한 형편이긴 하겠지만 누구도, 어디에서도 다루지 않아 '한번도 신간이었던 적이 없던 책'을 그간 만나왔던 친구들과 함께 '오늘만은 신간'일 수 있는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2. 2013년 여름부터 <문학의 곳간>이라는 모임을 매달 1회씩 정기적으로 열어왔습니다. '문학'이 저 멀리 있는 고고한 언어의 상찬만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모두의 '곳간'임을 매회 열면서 알리고 저 또한 이 모임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분기별로 '곁에 있는 작가'를 초청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이번엔 제가 그 이력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문학의 곳간 친구들이 포스터 제작부터 다과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살뜰히 챙겨주어서 오직 한번만 허락되는 첫번째 책에 대한 잔치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3. 오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친구로부터 한편의 글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끔 문학의 곳간 초대 문자를 보내고, 더 가끔 안부 문자를 주고 받았던 은진 씨께서, 지난 여름부터 <무한한 하나>를 정성들여 읽고 서평을 써주신 겁니다. 그간의 사귐 이력에서부터 <문학의 곳간> 이야기와 평론집에 수록된 평문들까지 정성들여 읽고 기록해주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은진 씨는 지역의 문화예술공간과 모임을 찾아다니며 경험했던 사귐의 이력을 살뜰하게 기록한 <AT>(그린그림, 2015)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4. 작년에 평론집을 출간하고 그간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게 제대로 소식을 전하지도 인사를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곡절이 많아 예정보다 너무 늦게 나온 책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편집위원으로 일해온 <신생>에서 강제적으로 퇴출당한 폭력적인 경험 때문에 지역에서 글을 쓰면서 사는 일에 대한 절망감이 컸던 터라 지역에서 쓴 글들을 사람들에게 내보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신생 사태>는 뒷담화와 눙치기, 그리고 조리돌림으로 유야무야된 듯하고, 지역문화예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할 목적으로 조직했던 <로컬데모> 또한 자체 역량 부족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에겐 치기어린 도발로, 또 누군가에겐 지역을 욕보이는 일로 보였겠지만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을 달고 오랫동안 몸 담고 있었던 곳에서조차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일방적인 퇴출을 당한 경험을 단순히 사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당시 연속으로 열었던 집담회에서 저는 ‘스위치를 켜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권리의 스위치 말입니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는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아 그 쓰임을 활성화시키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각자가 가진 권리의 전류가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로컬데모>가 콘센트가 되겠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 성과는 형편없을 정도로 미미하기만 합니다. 그 덕에 오랜 시간 지역의 각처로부터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아야만 했었습니다. <신생 사태> 따위는 잊혀졌겠지만 저는 그 사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로컬데모>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지우거나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그 실패 속에서, 그 실패와 함께, 실패를 밀고 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5. 너무 비장해졌네요. 즐거운 일만 적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못 심각하거나 우울한 일만 적을 수도 없습니다. 혹여라도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 단순화되어버릴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역에 대해 말하는 것도 어렵고 말하지 않는 것도 어렵습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 오긴 할까라는 체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만 이것이 저의 조건임을 다시 한번 수락하며 그 힘을 동력삼아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휴일 오전에 도착한 반가운 글을 읽고 기운을 내어 지난 주에 있었던 뜻깊은 자리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날 자리를 열어주었던 분들, 말을 건네주고 경험을 나누어주었던 분들, 손길과 발길을 기꺼이 내어주셨던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그날 하루, 제가 쓴 글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삶속에 함께 해주었던 관계를 기억하고 또 한 시절을 애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 은진 씨의 리뷰 "등을 내어주는 업기" : http://snoow.tistory.com/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