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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그 장소에(서) 정확하게 부는 바람

by 종업원 2018. 2. 28.




작년 겨울 초입에 발매된 최고은의 새앨범 <Nomad Syndrome>(블루보이, 2017)을 겨우내 웅크리고 들었습니다. 몇번을 들었는데도 들을 때마다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라운 에너지와 집중으로 숨소리 하나까지 음으로 응집하고자 하는 최고은의 음악적 진지함에 압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따금씩 차를 마시는 것 외엔 음반을 들으며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는데, 그건 진지하고 섬세한 사운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 홀로 좋아했고, 그래서 더 애틋했던 한 뮤지션이 ‘저 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이를 붙들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전처럼 똑같이 좋아할 수도 없었습니다. 좋아하되 그 좋아함을 모른척 지그시 내리누를 수 있을 때 곁의 사람을 동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좋아함을 모른척 하고 동료로 삼아 어울릴 때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최고은의 새앨범을 들으며 제가 보았던 풍경은 나로부터 멀어지는 누군가의 뒷모습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이의 뒷모습은 더 이상 내가 쫓을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이 아니라 ‘너머의 풍경’을 힘겹게 열어주는 음악가라는 동료의 힘찬 발걸음이기도 했습니다. 넘어가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저도 이곳에서 너머를 바라보게 됩니다. 끝내 당신을 좋아함으로써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 (각자의) 너머로 가고 싶다는 의욕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은 우리의 고향도, 우리가 당도하고자 하는 목적지도 아닐 것입니다. 잠시 머물고 있는 오늘의 장소일 뿐이지요. 너머로 향하는 동료의 발걸음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나를 깨웁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어 관에 가까워져버린 내 방문을 두드리고, 진군하는 나팔소리가 되어 저 너머에서 이곳까지 울려퍼집니다. 


최고은은 국악고등학교에서 판소리를 전공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간의 음반에선 판소리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적은 없었습니다. 1집 <I Was, I Am, I Will>(2014)에 ‘뱃노래’나 ‘아리랑’과 같은 노래가 수록된 적은 있지만 그건 한국적 포크를 찾아가는 음악적 시도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최고은은 통상적으로 포크 뮤지션으로 불립니다만(협소한 장르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음악을 추구하고 있는 음악가여서 제겐 ‘월드뮤직’으로 느껴질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 이름엔 소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길고 먼 여정을 떠나는 여행자의 서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원(始原)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미래에서 오는 소리를 받아 안거나 뒤쫓기도 하는 그 여정이 음악가 최고은의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Nomad Syndrome> 전편에 흐르는 최고은식의 아리랑은 멀고 긴 여정의 한 굽이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간 최고은의 노래를 들으며 때론 부드럽게 감싸고 때론 굽이치고 휘몰아치는 듯한 변화무쌍한 목소리가 어디든 당도하고야마는 ‘정확하게 부는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닌 어떤 굽이에 이르러서야 내비추는 모습을 보며 작은 배움을 얻게 됩니다. 성취가 아닌 추구로부터 도착하는 배움과 깨침 말입니다. 


배움은 꼭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어떤 장소에 입회하는 순간 단박에 배우는 경우도 있고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천천히 도착하는 배움도 있습니다. 누군가와 마주보는 시간 속에서 배우기도 하며, 응답하고 가르치면서도 배움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울림 속에서의 배움은 언제나 부대낌과 함께 합니다. 관계의 상호성 속에서 깃드는 배움은 아무래도 날렵하게 낚아채는 행위로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어울림 속에서만, 어떤 장소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낯선 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신의 습관과 버릇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행위 양식을 수락해보는 일, 장소를 보살피고 일구기 위해 몸을 움직여 돌봄의 노동을 수행해보는 일은 배움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곳에 있는 누군가가 배울 수 있는 터를 닦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건 선물과 환대처럼 받으면서 건네는 일이며 건네면서 받는 일입니다. [회복하는 글쓰기]라는 모임에서 글쓰기라는 행위로 잠시나마 어울림의 장소를 일구고 그곳에서 ‘욕심 없이, 의도 없이, 꾸밈 없이’ 각자의 글-선물을 주고받았으면 했습니다. 어쩌면 어울림이란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추구해야 할 비용(노동)에 가깝다고 해야겠습니다. 홀로 쓰는 것이 아닌 어울림 속에서 쓰고자 할 때 각자가 마주하게 되는 부대낌의 갈림길도 있겠지요. 쾌활하고 유연한 어울림만이 아니라 부대낌이라는 비용을 성실히 치루는 노동 속에서 잠시 읽고 쓰며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내게 건네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그곳에 가보는 애씀이 글쓰기라면('후기'라는 글쓰기) 그 글속에 맺히는 배움과 깨침은 더 이상 내 것만도 당신의 것만도 아니겠지요. 


그 장소에서만 맞이할 수 있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이 그 장소로부터 부는 바람이 되는 희망. 그곳에서 다시 잠시나마 어울릴 수 있기를 희망하겠습니다. 


ⓒ go-so-ho




[회복하는 글쓰기] 1차 강좌 후기(2018. 1. 22~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