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글쓰기

아무도 고백하지 않는 밤의 장소

by 종업원 2018. 1. 31.

2018. 1. 31



1.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라는 구절을 새삼스레 매만졌던 밤은 한 친구의 ‘집들이’ 초대를 받았던 날이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지만 아늑하고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한동안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저녁에 잊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의도 없이 주고 받았던 선물이 매만져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온기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란 막연하게 편하다거나 언제라도 ‘고백’이 가능한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편안함 속에서도 고백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에 가깝다. ‘터 놓는다’는 건 ‘터를 닦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친밀성으로 쌓아올린 폐쇄적인 커뮤니티인 것만은 아니다. 그날 저녁에 모였던 이는 세 사람에 불과했지만 편안하고 안락했던 시간을 헤아려보면서 ‘터 놓는’ 개방성의 태도가 ‘터를 닦는’ 노동의 문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와 ‘터를 닦는 일’은 ‘장소(화)’라는 어휘로 묶어볼 수 있다.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고백이라는 폐쇄적인 말하기 방식을 피한다면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장소가 더 많아지지 않을까.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나누는 말과 글이 누군가에게 열려 있는 장소를 만드는 공동의 노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도 고백하지 않은 밤에만 누구나 의도 없이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다.   



2.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는 문장이 내게 도착한 건 2015년의 어느 날이었다. 부산문화판에서 관례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부당 행위에 문제제기 하고자 조직한 모임 속에서 이 문장을 얻었지만 이걸 어떻게 써야할진 알지 못했다. 이 문장이 내게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쟁취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흘러 넘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는 문장이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고 있던 이곳의 현실임을 금새 알게 되었다. 나는 한동안 이 문장을 소중히 품었고 때론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안절부절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문장이 내 앞에 놓인 세상의 퍼즐을 풀 핵심적인 단서이거나 그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 같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의 글에서, 어떤 시절 속에서, 누군가로부터 도착하는 어휘가 있다. 내게 도착했다고 해서 이곳이 종착점인 것은 아니다. 잘 보살펴야 하고, 때로는 잘 키워야 한다. 그리고 잘 나누어야 하고 제 갈길을 찾아갈 수 있게 놓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 의도 없이 도착하는 문장과 어휘는 대개 나라는 ‘꼴’보다 큰 ‘틀’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건 선생이나 사장 따위가 내게 주는 것이 아니다. 흘러 넘쳐 내게로 온 어휘와 문장은 보살피고 채워나가야 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큰 존재(틀)다. 우리의 한 시절엔 늘 흘러 넘쳐 내게로 온 어휘가 함께 있다.  



[회복하는 글쓰기] <1. 단편 소설과 함께 비평 쓰기> 2강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