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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부사(副詞)의 역사

by 종업원 2018. 2. 21.



한 때 제 몸으로 삶을 꾸려온 이들이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것은 ‘늙음’이라는 생애사적 주기 때문도, 육체를 무너뜨리는 ‘질병’ 때문도 아니다. 늙음과 질병은 많은 원인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를 키우고 주변을 도우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말 없는 ‘우두커니’가 되어버렸다. 김숨은 그런 사람들을 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들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붙박혀 있는지에 대해선 별다른 설명을 하진 않는다. 질병(「간과 쓸개」)이나 유통기한이 다되었다는(「럭키슈퍼」) 간명한 설명 외엔 그들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별로 없다. 일 하는 사람에 관한 이력이 거의 제시되지 않는 걸 단지 소설적 설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두커니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별다른 설명 없이 소설의 중심에 놓아둠으로써 그들의 역사가 이 세상엔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유지되어왔던 세상이 그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어쩌면 집어삼켜버림으로써 제 몸을 불려가고 있다는 것을 김숨은 아무 말이 없는 사람들의 침묵을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침묵 앞에서 이런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말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이 말이 삼켜버리고 있는 말은 무엇인가. 


일 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이 세상에 기록될 수 없다면 그들의 애씀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퇴출된 문장들은 어디에 쌓이는 것일까. 아니, 이렇게 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문장이 빠지고도 어째서 그 글은 건재할 수 있는가? 범위를 조금 좁혀서 다시 물어본다면, 그 단어 없이도 어째서 그 문장은 성립될 수 있는가? 그이가 사라져버렸는데 어째서 이 세상은 아무 일 없이 그대로인가. 한때 절대적이었지만 언제라도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건 이러한 퇴출을 개별적인 불행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폭력)로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의 자리에서 ‘부차적인 것’의 자리로 옮겨졌음에도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문장이라는 세상의 중심은 아무래도 주어나 동사다. 그들에게도 한때는 주어의 자리에서, 동사의 자리에서 세상의 중심이 되거나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잠시 허락되었을 뿐 그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사(副詞)와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철학자 김영민은 일찍이 “나머지 문장 전체와 독립해 있으면서도, 이를테면 원격 조종으로써 일거에 그 문장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김영민, 『보행』, 철학과현실사, 2001, 147쪽)는 부사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독립하되 고립하지 않는다’는 지식인이 지향해야 하는 양식적 태도를 품사에 빗대어 강조한 바 있다. 특정한 성분을 수식하기도 하면서 문장 전체를 수식하기도 하는 부사는 형용사와 같이 상황에 따라 다채롭게 변주되는 ‘활용’이 불가능한 품사다. 이런 문맥에서라면 부사는 지식인의 기개와 결기와 퍽 어울리지만 김숨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라면 말 없는 ‘노동자의 몸’을 떠올리게 한다. 더 이상 ‘슈퍼’하지 못해 입을 열 수 없는 ‘금치산자’가 되어 가게(家系) 한켠에 방치되어 있는 사람에겐 ‘쓸모’의 기한만 기록되어 있을 뿐 '쓸모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다. '겨우'라는 부사는 어떤 문장(세상)에선 '어렵게 힘들여' '가까스로' 남은 것의 지위를 가지지만 어떤 문장에선 '잘해야 고작'인 것으로 치부된다.


‘슈퍼’하지 않기에 ‘럭키’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별 수 없이 ‘우두커니’ 남겨진다. 아무도 찾지 않는 가게에 자리하고 있는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존재들. 김숨의 소설은 이런 존재들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을 연민하거나 쓸모를 뺏아버린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게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들을 지켜보는 일, 그렇게 그들 곁을 지키는 사람이 소설가 김숨이다. 마치 소설을 쓴다는 것 또한 아무도 오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운명적으로 예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발길을 끊고 마침내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을 때 엄마와 나는 우두커니 남아 있는 아빠의 이마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고쳐 쓰기로 결심한다. 흙으로 빚어졌지만 차마 입을 가지지 못해 침묵해야 하는 존재의 이마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고쳐 써보려는 시도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해도 (다시) 쓰는 행위를 멈출 수 없다는, 쓰는 이의 운명에 대한 메타포처럼 보인다.


‘나’의 유년 시절, 누님과 함께 갔던 저수지에서 그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랫동안 첫째 누님이라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셋째 누님이 그 밤의 저수지에서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간과 쓸개」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부사적인 존재들의 역사에 대해 조용히 질문하고 있다. (우리) 안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개입하고 있었으면서도 언제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바깥으로 내몰릴 수 있는 존재들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될 수 있을까. 부사(적인 존재들)의 역사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역사가 쓰일 수 없는 것도 분명 아니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2013), 『바느질하는 여자』(2015), 『L의 운동화』(2016), 『한 명』(2016). 증명할 수 없고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에 관해 김숨이 써나간 장편 소설의 목록이다. 


   




[회복하는 글쓰기] 1-5강 후기_2018. 2. 21